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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의 얼 선양

춘천박씨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16. 7. 10.
춘천박씨(春川朴氏)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6/03/18 [00:03]
시조 박 항(朴恒,자는 혁지)은 신라 경명왕의 일곱째 아들 박언지(강남대군)의 11세손이다.
박항은 고려 고종14년(1227)에 춘성군 장본, 맥국의 도성이었던 신북읍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조정의 문서를 작성 보관하던 관청)에 등용되면서
벼슬생활을 시작했다. 충주목사를 거쳐 충렬왕 때 동지밀직사로 원나라에 다녀와
좌명공신이되고 춘성(춘천) 부원군에 봉해졌다.
 자감 관리, 중추원 승선(정3품직) 등 두루 요직을 거쳐서 박항의 나이 쉰둘인
충렬왕 4년(1278)에 동지밀직사(왕명 출납 관장하며 군사기밀 담당 종2품직)로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2월에 환국했다. 왕을 무사히 호종한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반역자를 물리친 공신)이 되었고 중서문하성 평장사(平章事;국무총리격인
 문하시중 바로 아래 정2품직)를 거쳐 삼중대광(정1품직)에 올랐다. 충렬왕은 그간의
노고에 답하고자 박항을 춘성부원군에 봉했다. 작고한지 백여 년이 지난 공민왕 때
 박항의 충효와 애국치적을 포은 정몽주가 상소하여 마침내 조정에서 문의공(文懿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고려에 침입하여 군기와 군량을 징발할 때였다.
전쟁포로 다루듯 원나라 감독관 혼도와 홍다구 등의 횡포가 심했다.
이를 보다 못한 박항이 원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감독관의 횡포를 막았다.
많은 백성들이 그의 덕망과 지혜에 감복했다.
문장이 뛰어나고 모든 일에 공명정대했다. 후손들이 춘천에 대를 이어 살면서
본관을 춘천으로 하였다. 박항의 묘소는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에 있다.
박항의 큰아들 원굉은 아버지처럼 평장사를 역임했으므로 평장사공계라 불리고 둘째아들
원비는 예조판사를 지냈으므로 판사공계라 한다. 평장사공계는 13개 계파로,
 판사공계는 14개 계파로 분파되어 모두 27계파로 자손이 번창했다. 박안구는 대제학,
박의공은 병조판서를 지냈다.
평장사공계 원굉의 묘소는 원래 3군단 본부 국기게양대 자리에 있던 것을 부대가
들어오는 바람에 기린면사무소 뒷산으로 이장했다. 동네 사람들이 박 대감 묘라고 부른다.
 둘째, 판사공계 원비의 묘소는 육로로 청평사 가는 북산면 청평리에 있다.
고려 말의 학자 익제 이제현은 박항의 손자 사위다. 익제는 말년에 청평산(지금은 오봉산이라 부름)에 들어와 문수사를 열고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김시습도 그랬고 춘천부사를 지냈던 상촌 신음, 어우당 유몽인, 다산 정약용도 소양강을 따라 춘천에 오면 익제는 없지만 그가 살았던 청평산을 찾았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전해진다.
춘천박씨 후손 가운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별로 없다.
춘천박씨가 고려에 벼슬했던 사람의 후손이라는 데서 조선조에서 기피했고,
또 후손들도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싫어한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이퇴계(李退溪) 선생은 문의공 5대손인 사정공(司正公) 박치(朴治)의 외손자다.
그래서 퇴계는 가끔 외가가 있는 춘천에 와서 머물렀다. 그곳이 지금의 퇴계동 부근이며 '퇴계(退溪)'라는 동네 이름도 이때 생겼다. 퇴계 선생이 춘천에 머무르는 동안 항상 밥상에는 '공지'(고기이름)가 반찬으로 올랐다. '공지'라는 고기는 지금 남춘천(南春川)과 춘천 시내 사이를 흐르는 냇물(지금의 공지천)에서 잡혔다. 공지천(孔之川)이란 이름도 이에 연유한 것이다. 이 '공지'라는 고기는 성인이 있는 곳에서만 사는 것으로 전해오고
있는데 지금은 멸종되고 말았다.
퇴계의 어머니는 춘천박씨 부인이다. 박씨 부인은 진보이씨 가문의 이식과 결혼하여
다섯 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중 막내였다. 부인은 전실인 의성김씨가
낳은 삼남매까지 모두 여덟명의 자식을 양육했다. 32세에 홀로된 퇴계의
어머니는 남편의 3년상을 마치자 제사일은 맏이에게 맡기고 그 옆에 방을 지어 거처하면서
더욱 열심히 농사를 짓고 누에를 쳤다. 갑자년(연산군 10년, 1504)과 을축년(연산 11년)에는 부역과
세금이 혹심하여 많은 사람들은 살림 결단났는데도 박씨부인은 능이 먼 앞날을 내다보고 환란을
도모할 수 있었으며 옛 가업을 잃지 않고 지킬 수 있었다.
박씨 부인은 생업을 혼자 책임지고 자식들 교육도 힘쓰면서, 특히 편모자식 소리를 듣지 않도록
몸가짐과 학문 연마를 독려하였다. 퇴계의 외가는 지금 퇴계동 한주와 금호 아파트 부근이었다.
퇴계 이황의 학문적 경지가 높아지자 그의 호 퇴계를 따서 금병산에서 발원해서 곰진내에 이르는
개울을 퇴계천, 외가동네를 퇴계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과거 급제자는 박문도(朴文道, 1624 甲子生) : 문과(文科) 현종7년(1666) 식년시 병과(丙科), 박상범(朴尙範, 1854 甲寅生) : 문과(文科) 고종27년(1890) 별시 병과(丙科), 박광선(朴光先, 1854 甲寅生) : 문과(文科) 정종1년(1399) 식년시 병과(丙科), 박형량(朴亨良, 1854 甲寅生) : 문과(文科) 세조6년(1460) 평양별시 이등(二等) 등 18명이 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박동진을 비롯해서 민요연구로 이름난 강원대 박민일 교수, 춘천교대 총장을 지낸 박민수 시인, 강원도 자치행정국장을 지낸 박영환 등이 춘천 박씨네 사람들이다.

출처:새만금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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