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주 한산이씨 이색 손. 이만규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이만규의 가정교육 방법
일제 침략기에 활동한 교육학자이자 실천가인 이만규는 가정교육의 방법을 가정화락(家庭和樂)의 법칙 7가지와 자녀교육의 비결 7가지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가정독본(家庭讀本)」, 창작과 비평사, 1994).
가정화락의 법칙
1. 잔소리를 말아라.
예로부터 가정적 비극의 큰 원인은 가정안 잔소리에 있었다. 남편은 안해에게 대하여 안해는 남편에게 대하여 잔소리를 잘하는 가정에 평화와 행복이 있을리가 없다.
2. 간섭을 말아라.
가정은 원래 성격이며 경우며 교육이며 취미가 서로 다른 두 사람 동지가 모여 이루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자의 생각이며 행동을 모두 자기 마음대로 시키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작정되어 있는 것이다. … 이러한 불간섭 주의는 결코 무관심하게 방임하라는 것이 아니오 차라리 서로 인격존중과 품성신임(品性信任)에 기초 삼으라는 것이다.
3. 비평을 말아라.
반드시 해야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안식의 처소요 위안의 성전인 가정에서의 비평은 삼가하는 것이 좋다. … 톨스토이 백작의 말년 비극은 부인의 그칠새 없는 잔소리와 반항으로 생겼고, 링컨의 가정적 불행은 부인의 히스테리 행동으로 생겼다.
4. 서로 동정하여라.
가정의 행복은 오직 동정이라는 시멘트로만 굳어지는 것이다. … 동정은 이해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이해는 다만 상대자의 성격, 재능, 사상 따위를 아는 것으로만 만족한 것이 아니다. 그외에 취미, 기호까지도 이해하여야 한다.
5. 조그만 친절을 베풀어라.
부인을 기쁘게 하는 데는 반드시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사 줄 필요가 없다. 거리의 꽃집에서 산 한송이 장미에도, 여행지에서 산 예쁜 그림엽서에도 다 진정한 마음이 깃든 프레젠트면 아내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건강한 아내에게 주는 한송이 꽃이 병원에 누운 뒤에 가지고 가는 한 상자의 보배보다 더 값지다.
6. 예의를 지켜라.
가정을 즐겁게 하는데 필요한 한 가지는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예의는 사람과 교제하는 데 가장 긴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가정안에서는 등한시 하기가 쉬운 것이다. … 무례는 사랑을 썩혀 먹는 암종(癌腫)이다. 남과 교제하는데 예의가 필요하다면 늘 접촉하는 가족들에 대하여도 그것이 필요할 것이다. 예의는 결혼전보다도 차라리 결혼후에 더욱 필요한 것이다.
7. 성적 지식을 가져라.
가정을 즐겁게 하는 법칙중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성적 지식을 갖는 것이다. 성에 관한 예비지식을 갖지 않고, 결혼생활에 들어가는 것은 무모한 모험이다. … 미국의 한 전문가는 "물론 성은 결혼생활에 대한 여러가지 만족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관계가 잘되지 아니하면 다른 어떤 것도 잘되지 않는다."라고 한다.
야자 이만규
2)
이만규
1889~1978. 의사. 교육사학자. 국어학자. 강원도 원성군 간현 출생.
경성 의학 강습소(경의전문 전신) 졸업.
개성에서 병원 개업.
의사를 그만두고 송도고보 교사(1913~1926).
1926년에 배화여고로 옮겨 교장에까지 이름.
3·1운동 때 4개월 옥고.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6개월 옥고(1938).
1942년 조선어 학회 수난으로 1년 옥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 초안 작성 위원.
표준말 사정 위원(강원도 대표).
저서: 조선교육사(을유문화사, 1947/1949).
3) 이철경(李喆卿)
1914~1989. 서예가. 호 갈물.
본적을 강원도 원성군 지정면 간현리로 두고, 1914년 6월 3일 경기도 개성시에서 출생하여 1989년 6월 14일 서울에서 76세를 1기로 영면했다. 그는 교육자, 의사, 한글학자, 민족주의자인 이만규의 3녀로, 전 서울고교 교장이었던 교육자 서정권의 부인으로, 가수이자 방송인인 둘째 아들 서유석 등 3남 2녀의 어머니로, 40년을 교육자로, 60년을 예술가로, 수십 년을 여성운동가로 일인 다역의 삶을 살아온 추앙 받는 모범여성이다.
그는 예술가로의 우리말조차 사용하기 어렵던 일제시기와 현대를 살면서 자신의 전공인 음악 보다 한글서예가로 남궁억(1863~1939), 윤백영(1888~1986) 등과 더불어 한글궁체의 서 예술화 활동을 왕성하게 해왔고, 더불어 오늘의 한글서예를 정착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철경․각경(珏卿)․미경(美卿) 세 자매가 모두 한글서예에 침혹(沈惑)하여 뛰어난 필재(筆才)를 발휘하였는데, 각경과는 쌍둥이다.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 1938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강사, 배화․이화․진명․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하였고, 1960년부터 1979년까지 금란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일찍이, 1948년 문교부 검인정교과서 검정위원과 서예교과서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갈물한글서회를 창설하였으며, 대한주부클럽연합회 회장, 여성교육자회 회장, 사단법인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한일여성친선협회 이사,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단 자문위원,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회장, 국정자문위원 등을 두루 역임하여 여성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8회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고, 미경과 자매전을 캐나다와 미국에서 열었으며, 1991년 《갈물 이철경서 집》을 발간하였다. 이밖에도 많은 단체전에 참가하였으며, 수상으로는 1929 ~1930년 동아일보사 주최 전국학생작품공모전 서예부문에 입상하였고, 1969년 제1회신사임당상, 1974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궁체쓰는 법》․《초등글씨본》․《중등글씨본》․《한글습자 가정편지틀》․《한글서예》․《한글》 등이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관동별곡〉․〈속미인곡〉․〈김활란박사 묘비〉․〈신사임당동상 명문〉․〈육영수여사 묘비〉․〈유관순열사 기념비〉․〈독립선언문〉․〈고당 조만식선생 어록비〉․〈이승만박사 어록비〉․〈나의 소원〉(白凡 金九) 등이 있다.
갈물 이철경(李喆卿)은 본적을 강원도 원성군 지정면 간현리로 두고, 1914년 6월 3일 경기도 개성시에서 출생하여 1989년 6월 14일 서울에서 76세를 1기로 영면했다. 그는 교육자, 의사, 한글학자,
4) 이각경
한국 최초의 여성기자는 매일신보의 이각경이다. 이씨는 경성출생으로 한성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으로 건너가 공부하다 곧 귀국했다. 그후 교육계에서 2년 종사하다가 1920년 9월 5일 매일신보에 입사하였다.
우리 나라의 최초의 여기자는 1924년 10월부터 <조선일보>에 근무했던 최은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사저널 1992년 9월 17일자 문화란에 실린 정진양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글에 의하면, 공채로 신문사에 들어간 최초의 여기자는 최은희보다 4년 먼저인 1920년 9월에 <매일신보>에 입사한 이각경이다.
<매일신보>는 1920년 7월 1일 신문에 여기자 공채사고를 내고 우리 나라 최초로 여기자를 채용하게 되었다. 응모자격은 가장있는 부인이라야 하며, 연령은 20세 이상 30세 이하이고, 학력은 고등보통학교 졸업 정도 이상으로 문필에 취미가 있어야 한다.
<매일신보>는 가정개량과 여성계의 개조를 위해서는 현숙하고도 박학한 여기자의 책임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여기자의 자격 가운데 첫째가 '가장있는 부인'이었으며, 명칭도 '여기자'가 아니라 '부인기자'였다.
부인기자로써 이씨는 여성을 위한 계몽적인 기사를 주로 썼고, 보수를 바탕으로 한 개혁론을 피면서 여성운동의 최첨단에 서서 기수노릇을 하였다.
5) 이철경(갈물, 1914∼1989) :우리나라 10대서예가
갈물 이철경은 월북한 그의 언니인 봄뫼 이각경과 동생 꽃뜰 이미경과 더불어 세 자매 모두 우리 글씨예술 발전에 기여한 특출한 한글서예가들이다. (1991년 5월, 북경에서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코리아선화전>과 토론회장에서 남북서예인이 한 자리에 만났을 때, 필자는 북쪽 서예가 최용진으로부터 그의 평양예술대학생 시절 이각경 선생으로부터 궁체를 배웠다는 말을 직접 들을 수 있다) 그들의 부친 이만규는 서울의대 전신인 대학의원 부속의학교를 졸업하고 외과의사가 되었으나 민족교육자로 변신, 3.1만세운동 참여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민족주의자로 <가정독본>과 <조선교육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따라서 그들은 가친으로부터 크게 영향 받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갈물은 네 살 때부터 부친에게 <천자문>으로 한문서예를 배웠다고 한다. 1928년 15세부터 한글서예를 시작, 60년의 세월을 이 나라 궁체글씨 연구와 교육에 일생을 받친, 사임당선생 이후 500년 역사에 가장 존경 받을만한 여성 예술가임을 아무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실제 1969년 주부클럽이 제정한 제1회 신사임당상을 수상하였으며, 국민훈장 목련장(1974)과 외솔상(1979)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의 업적은 '민족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목적으로 한 갈물 한글서회 창설(1958)이다. 갈물 선생은 갔어도 40여 년을 헤쳐 온 갈물의 물결은 그 무늬만큼이나 아름답기만 하다. 저서로는 최초의 우리 글씨교본인 <궁체쓰는법>(상권, 1933)을 비롯, 1946에 발간된 <초등글씨본>과 <중등글씨본> 각3권, <한글글씨체>2권, <한글습자 가정편지틀>(1947) 등 다수가 있다.
6)여운형은 1934년 11월 어느 날 충청남도 아산의 어라산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묘소를 찾아 갔다가 황폐한 모습을 발견하고 다음해 봄이 되자 허물어진 묘를 손질하여 둥글게 만드는 등 토역작업을 말끔히 끝내고 주변에 나무를 심었으며, 서예가인 이각경에게 부탁하여 이순신 장군을 칭송하는 공덕비를 세웠다.
이렇게 하여 여운형은 이순신 장군의 조국애와 멸사봉공의 위업을 기리고 그 후손들을 위로했지만, 이를 통해 민족정기를 바로 하자는 속뜻이 있었다.
7)갈물 이철경의 생애와 서예 술
Ⅰ. 머리에
갈물 이철경(李喆卿)은 본적을 강원도 원성군 지정면 간현리로 두고, 1914년 6월 3일 경기도 개성시에서 출생하여 1989년 6월 14일 서울에서 76세를 1기로 영면했다.
그는 교육자, 의사, 한글학자, 민족주의자인 이만규의 3녀로, 전 서울고교 교장이었던 교육자 서정권의 부인으로, 가수이자 방송인인 둘째 아들 서유석 등 3남 2녀의 어머니로, 40년을 교육자로, 60년을 예술가로, 수십 년을 여성운동가로 일인 다역의 삶을 살아온 추앙 받는 모범여성이다.
그는 예술가로의 우리말조차 사용하기 어렵던 일제시기와 현대를 살면서 자신의 전공인 음악보다 한글서예가로 남궁억(1863∼1939), 윤백영(1888∼1986) 등과 더불어 한글궁체의 서 예술화 활동을 왕성하게 해왔고, 더불어 오늘의 한글서예를 정착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떠난 지 10 여 년, 그에 대한 자료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비평적인 흐름의 전기적 작가론을 서술함에 있어 필자로서 어려움이 있음을 밝힌다. 혹시 이 미흡한 글이 그에 대한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이 글에 대한 사실 검토와 구술적 자료를 제공해 준 갈물의 맏딸 서경옥님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Ⅱ. 외로운 서예 학습의 길
이철경은 1919년 만 4세 때부터 부친에게 천자문으로 한문서예를, 1928년 15세부터 한글서예의 공부를 시작하여, 영면하던 해 갈물한글서회전 찬조 출품까지 60여 년 동안 오로지 한글서예, 그것도 궁체 쓰기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는 일제 시기와 현대의 한글서예를 잇게 한 서예계의 큰 별이었고, 또 일생을 교육자로, 사회활동가로, 서예가로, 한 가정의 주부로 어느 하나 소홀함 없이 모범을 보여 제1회 신사임당상을 수상하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모범여성으로 귀감이 되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1. 부친 이만규를 비롯한 온 가족의 서예 교육열
갈물은 개성에서 송도고등보통학교에 근무하던 부친 한산(韓山) 이씨 만규(萬珪)와 모친 밀양(密陽) 박씨 현숙(賢淑)의 2남 4녀 중 3녀로 태어났다.
본적지인 강원도 간현리는 고려말 문신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후손들이 살아온 한산 이씨 집성촌이다. 그는 이색의 20세 후손으로 조선시대 명종 때 영의정 청백리였던 송와공 이기(松窩公 李賠, 1476∼1552)의 13세 손이기도 하다.
이만규(1889. 12. 2∼1978. 7. 13)는 서울의대 전신인 대한의원 부속의학교를 졸업하고 개성에서 외과 의사를 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중단하고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유교사상과 기독교 윤리관을 겸비한 교육자로 배화여중 교장을 역임하는 등 여성교육에 앞장선 선각자였으며, 3·1운동 참여와 조선어학회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른 민족주의자로 가정독본, 조선교육사 등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갈물의 스승이자 후원자 역할을 한 그는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한글을 사랑했고, 딸이 체본을 보고 글씨를 쓰는 방법에 대해 지도를 하면서, 대궐 안에서 상궁들이 쓴 글씨를 운현궁 등에서 빌어내어 직접 보고 쓰도록 하는 등 갈물과 쌍둥이 언니 각경(珏卿)의 글씨 공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큰언니 임경(姙卿)도 막내인 꽃뜰 미경(美卿)에게 글씨 지도를 할 정도였고, 부친 역시 한문 글씨 지도를 할 정도로 온 가족이 서예가족 일색이었다.
부친의 선각자적 교육열로 갈물 자매들은 당시로는 드물게 전문학교를 다녔고, 그 중 철경과 미경 두 자매는 피아노 전공을 하였다. 또한 3자매의 아호를 봄뫼, 갈물, 꽃뜰로 지어 주었으며, 심지어는 비단 땅, 비단 마음, 비단 글, 비단 글씨라는 우리 글을 사랑하는 정신이 깃든 두인(頭印) 문구를 지어주기까지 했다. 세 자매 역시 부모의 교육방침을 잘 따라 열심히 서예공부를 했기에 북한에서 이각경, 남한에서 갈물과 동생 이미경이 한글서예 분야의 일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같이 서예공부를 열심히 하게된 부모님의 은혜를 갈물의 자작시조 서예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늘 찾아 돗자리를 이저리 옮겨 펴고
물 많은 꿀참외를 상으로 주시면서
손수 먹을 가시어 북돋아준 아버님
벼루 집 뚜껑 위에 두루마리 감아들고
세필을 높이 들어 고즈너기 흘리시면
철 따라 흔연한 사연도 격조 높던 어머님
어려서 서예공부를 하도록 돌봐준 부모님을 생각하며 직접 지은 시조를 쓴 <어버이를 추모하며>라는 8곡 병풍 작품에 나타나듯, 부모님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아 자신의 전공도 아닌 여기 생활 60여 년을 한글서예로의 길로 매진하였다
갈물은 5세 되던 1918년 4월에 개성의 한 유치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 3월 독립만세운동으로 집안 남자가 모두 검거되고 교문이 닫히는 사건으로 1년을 부친의 고향 간현리에 내려가 있게 되어 붓글씨 공부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에 개성의 호수돈보통학교에 조기 입학하여 다니다, 5학년 때 부친의 전근으로 서울의 배화보통학교로 편입한다. 그리고 14세 되던 1928년에 서울에서 입학이 가장 힘들었던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 전신)에 언니 각경과 함께 입학한다. 1학년 때 부친의 서가에서 언문체법을 발견하면서 갈물은 이 체본에 나타난 언문 글씨의 조형적 아름다움에 관심이 쏠려 한글 쓰기에 전념했으며, 모친이 언문편지를 쓰는 멋있는 모습에 도취되어 더욱 한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
갈물은 한글의 단아하고 아름다운 구성의 미를 스스로 깨닫고 조화미와 생동감이 돋보이는 작품을 창작하게 되었고, 계속 스스로 연마하면서 궁체의 필법을 체계화시켰다. 그러한 사실은 “나는 초기에는 궁중여인들의 글씨나 정경부인들의 글씨를 옥한문체(玉漢文體)인 잔글씨 그대로 모방하여 익혔다. 한문옥법(漢文玉法)을 익힌 솜씨로 한글글씨의 요령을 분석하며 익히는 과정에서 자획의 구성 요령을 터득하였고, 큰 글씨로 키워서 시도하였다.”고 한 그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학년을 수료하고 아버지가 근무하는 배화여고보로 전학하여, 이해 가을에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전국학생서예작품공모전’에 서간체의 한글 궁체 <오우가>를 출품하여 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당선되었다. 한글 작품이 드문, 특히 한글 말살정책이 강화된 일제시기였다는 점에서 그의 입상은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이듬해인 1930년에 같은 공모전에 출품 입상함으로써 한글서예에 대한 대외적인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이화여전 음악과에 입학 피아노를 전공하면서, 갈물은 본인의 희망과 고집으로 서예공부를 병행한다. 이때는 일본서예를 조선인에게 물들게 하려고 애쓰던 시기였으나 갈물은 이에 굽히지 않고 한글서예공부를 열심히 하여 2학년 때인 1932년에는 제1회 조선서도전람회에 한글작품을 출품하여 당당히 입선한다.
갈물은 한글 쓰기 공부를 하는 한편 저술활동에도 관심을 두게 되는데, 1933년에는 학생신분으로 「궁체 쓰는 법」이라는 서예글씨본을 출판하게 된다. 당시 한글말살 정책시기였던 관계로 일본경찰에 걸려 발행된 지 5일만에 모두 압수되어 판금조치를 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갈물은 부친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소환되는 등 고통과 곤욕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갈물이 꾸준히 한글서예에 매진하게 되는 데는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부친 이만규와 배화학교 은사인 한글학자 김윤경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이로 인해 한글을 사랑하는 민족정신이 부녀간에 더욱 굳어졌으리라고 본다.
2. 이산가족으로 결별한 4경(卿) 자매의 서예업적
갈물은 쌍둥이 언니 리각경(북한식 이름, 1914년 6월 3일 출생∼생사불명, 재북 작가), 동생 이미경 3남매는 나란히 남과 북에서 한국서예사에서 보기 드물게도 한글전공 서예가로 정상에 서서 작가인 동시에 지도자로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겼다. 언니인 리각경은 미경과 함께 어린 시절 한글 쓰기 공부를 했고, 1946년에는 「어린이 글씨 체법」을 간행하였으며, 북에서 정상급의 서예전문 작가로 그 명성을 떨쳤다.
동생인 이미경은 1939년 이화여전 음악과를 나와 이화여중고에서 10여 년 교사 생활을 했고, 한편 수많은 갈물서회 회원 및 중앙문화센터에서 한글서예 지도를 직접 했으며, 현재도 정신적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꽃뜰은 개인전, 국내외 초대전 등에 갈물 작품 못지 않은 격조 높은 한글궁체작품을 출품하는 등 작품활동과 저술활동을 왕성하게 해오고 있다.
또 광복 전에 남쪽에서 경성사범학교를 나와 교사생활을 하면서 막내 여동생 미경의 글씨 쓰기를 지도했던 북쪽의 큰언니 임경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서예자매의 일원이다. 때문에 친 4자매 모두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한글서예의 뿌리를 깊게 내려 주고 줄기와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도록 가꾸어 오는데 남긴 업적과 가족적 사례는 앞으로 어디서도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Ⅲ. 청장년기 교사 생활과 서예교육자의 길
갈물은 1935년 이화여전을 졸업하면서 전주 기전여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여 평양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 배화여자고등여학교, 이화고등여학교 교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10여 년의 교직생활 중 25세의 나이로 29세인 서정권(전 서울고교 교장)과 결혼하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이때 창씨개명, 어문말살정책 등으로 한글은 발붙일 곳이 없게 되자 한글서예는 더욱 암흑기를 맞았지만 갈물은 개인적으로 한글서예 연마에 열중하였다.
일제말기 전쟁을 피해 갈물 부부는 1남 3녀의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서울을 떠나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빈농마을에 교원직을 사임하고 피신해 있던 차 광복을 맞이한다. 이 즈음에 한글학자이며 당시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있던 최현배의 권유로 한글서예 교과서 만드는 일에 참여하여「초등글씨본」과 「중등글씨본」 3권씩을 냈으나 저자가 여자라는 비난과 한문 위주의 서예가 주류를 이루던 때인지라 주변으로부터의 편견에 어려움을 당했으며, 이를 가르칠 교사가 없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갈물은 춘천고등여학교에 근무하면서도「한글글씨체」와 「가정편지틀」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갈물은 이같이 여러 종류의 한글서예 연구 서적 및 교본을 출판함으로써 그의 능력을 인정받고, 한글서예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새롭게 갖게 하는 한편, 문교부 검인정교과서 검정위원 및 서예교육과정심의위원으로 국가 수준급의 자문활동에 위촉되어 서예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갈물은 충남여고와 수원여고에서 음악 교사와 서예특별활동지도 교사로의 정식 교사 생활을 끝내고, 1954년부터 배화, 진명, 경기여고 서예강사로 오로지 한글서예지도 보급에 힘쓰게 된다.
Ⅳ. 여성 사회운동가로의 서예작가 활동
갈물은 40대에 새로운 도약의 길에 들어선다. 1960년 4월에 금란여중고 교감으로 취임하여, 1979년 교장으로 정년퇴임하기까지 교육자, 여성운동가로 활약하면서 서예가로의 활동도 눈부시게 하였다. 6,70년대 갈물은 여러 분야에 지도자급으로 참여하여 1969년에는 주부클럽연합회가 수여하는 제1회 신사임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회갑을 맞이한 1974년에 첫 개인전을, 1977년 제2회 개인전은 미국의 시카코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분산전을 개최하여 한국 문자인 한글의 서예미를 국제적으로 보여주는데 기여했다. 이어 현대미술관초대전에 <훈민가>를 출품하였고, 청림 창립전에 <누가복음 4장>을, 세종미술초대전에 <그리운 강남>과 <정인보의 자모사>, 제2회 청림전에 <시편1>과 <아가서>를 출품하는 등 여러 단체나 기관에서 주최하는 대외 전시행사에 활발히 참여한다.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배화학원으로부터 여성교육·한글서예 발전 공로 표창장,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사업회로부터 외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당시 그의 한글작품은 정통성 있는 궁체 맛이 덜 풍기는 작품들로 80년대 작품들과는 구별된다. 즉 글자의 세로 서선 앞부분을 다른 부분보다 아주 굵게 나타냈고, 상하로 길게 결구 시킨 자형, 서선의 유연성이 적은 경직된 느낌이 보인다. 그런 특징은 <관동별곡>(정자체), <속미인곡>(정자체), <마태복음 육장>(흘림체), <고시조>(흘림체)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1970년에는 중학글씨본을 저작하였는데 여기에 나오는 한글 정자체와 흘림체에서 일반작품으로부터 나타나는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작품들에서는 고전 궁체풍의 유연성이 풍기는 글씨로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을 확실히 볼 수 있다.
Ⅴ. 궁체의 성숙미를 이룩한 작품 활동
갈물은 1980년부터 별세하기까지 10여 년간이 작품 성숙의 절정기였으니, 교직에서 정년 퇴임한 후 왕성한 사회활동은 작품 활동에도 활력소가 되었다.
사회가 그의 작품을 더욱 필요로 했고, 그 역시 이에 응하기 위해 더욱 나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노력했으리라고 본다. 그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79년 말부터 맡아오던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 활동을 1984년까지 했고, 대한적십자 조직위원, 평통자문위원, 독립기념관 추진위원, 월간 신앙세계 후원회장. 신앙세계 이사, 민통 중앙지도위원, 대한적십자 서울지부 부지사장, 한국기독교 미술인 협회 회장, 국정자문위원, 신앙세계 이사장,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창립고문 등 수없이 많은 사회활동을 67세 이후부터 76세로 별세할 때까지 계속했다.
70년대 중반부터 변화하기 시작한 작풍은 80년대에 들어 더욱 발전된 완숙미를 보여준다. 그는 한글 궁체의 조형미가 뛰어난 많은 작품들을 창작 발표하는 한편 한글서예에 대한 저술 활동을 통해 궁체서예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니, 1980년에는 「한글서예」를, 1981년에는 꽃뜰과 공동으로 「한글」이란 저서를 출판하였다.
1980년부터 1981년까지는 국내외에서 제 3, 4, 5회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1985년부터 1988년까지는 제 6, 7, 8회 개인전을 신앙세계사 초청으로 개최하였다. 또 1982년부터 1989년까지 현대미술초대전, 제3회 한국현대미술대전, 1983년 원로중진작가 기독교미술인 초대전, 1988년 한국서예백년전 등 굵직한 초대전에 한글궁체작품을 출품하였다.
특히 1989년 별세하던 해 노령에도 불구하고 갈물서회전에 찬조 출품하는 한편, 89현대미술초대전에 500여 글자가 넘는 긴 문장을 정연미가 풍기게 또박또박 정자체로 쓴 <이황님의 도산12곡>을 출품하여 한평생 오로지 한글서예 발전에 대한 집념을 몸소 보여 주었다.
Ⅵ. 후진양성과 갈물한글서회 41년
갈물은 자신의 발의로 1958년에 한글서예의 발전을 위해 22명의 회원으로 갈물한글서회를 결성했다. 9회까지는 갈물과 제자들만 참여하는 서예전시 행사였다가, 꽃뜰 이미경의 제자들과의 연합전으로 양과 질적인 면에서 확대되었고, 1991년 제30회 전시회에는 300명이 넘는 회원 중 220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전시회로, 갈물 선생 10주기인 1999년에는 480여명의 회원으로 발전하였다.
갈물회는 초창기에 정하건, 이유성, 권영호 등의 남성회원을 참여시키기도 했으나, 1988년 10월 22일에 금남의 순수여성단체를 고수하기로 확정하였다.
이렇게 41년 동안 성장 발전된 갈물회는 질과 양면에서 발전 향상되었는데, 그 예로 1975년부터 국전, 대전 등에서 대상수상·우수상 수상자와, 특선 및 입선자가 많이 나왔고, 초대작가, 심사 및 운영위원 등으로 초대되었으며, 미술 및 서예단체 임원 등으로 수많은 회원이 활약하고 있다. 또 수백 점에 달하는 회원들의 한글 서예작품을 해외공관에 소장시켜 국위를 선양하는 등 한글서예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그 활약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제 갈물회원들도 설립 취지인 ‘민족문화의 창조적 계승’의 뜻을 더욱 실천 발전시키되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구체적 목표를 정하여 다양성과 참신성이 돋보이는 한글서예의 전승교육, 작품창작, 전시행사, 학술행사, 출간사업 등에 노력할 것을 권장해 본다. 덧붙여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천을 기대해 본다. 그리하여 회칙에도 없는 궁체 전승 위주에서 벗어나, 새로운 서체 연구에도 전념하여 갈물이 초창기에 내세운 창조적 계승 정신을 실현해 주길 촉구해 본다.
Ⅶ. 맺으며
갈물은 60여 년의 서예활동을 전업이 아닌 여기(餘技)로 일관했고, 국전 같은 공모전에 출품이나 심사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업서예가 누구에게도 개인지도를 받지 않고, 오로지 부모님의 열의와 보살핌으로 대성한 곧고 맑은 선비형의 서예가였다.
이 같은 면모는 “내가 가지고 있는 서예의 기능은 처음부터 여기로 시작했던 것이며.....취미와 교양중심으로 닦아 온 여기는 내 평생의 반려로서 이어져 왔고, 여생에는 더욱더 친근하여 나와 뗄 수 없는 생활이었다. 한글서예를 나의 여기로서 아무 야심 없이 그저 성실하게 꾸준히 연마하여 숙련되는 과정에서 조상들의 드높은 도덕적인 성품을 배웠고, 아름다운 자연과 풍요로운 우리 민족성의 본질을 배웠다.”라는 그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는 한글 문자를 궁체서예작품으로 아름답게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서체의 아름다움을 적절한 어휘를 써서 문장으로 표현하는 수준 높은 서술력을 그의 글에서 보여주고 있다.
“옛 어른들의 글씨를 찬찬히 들여다보노라면 야무지고 단정한 모습, 빳빳하여 강직한 지조, 반듯반듯한 안정감, 맑고 시원한 청아함, 엄숙하여 신앙처럼 숙연함, 맥맥히 흐르는 강인한 인내심과 투지력, 청청히 흐르는 창해의 위엄, 계곡의 물소리 같은 속삭임, 휘늘어져 마냥 방분한 자유와 멋, 정상을 향하여 백절불굴 치닫는 듯한 생명감등 정감이 넘치는 필자의 개성과 인품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이 갈물은 한글의 아름다움에 대한 높은 미적 안목을 기본으로 창작함으로써 소외당하는 한글궁체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활동을 60여 년 동안 해오면서 질적이나 수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수준 높은 수많은 흔적들을 남겼다.
갈물의 유작이라 할 한글서예 작품은 무려 3,000여 점으로 추정하는데 대표적인 작품이나 금석문으로는 ‘서울신문’ 제호(1966), 김활란 박사 묘비문과 영남도로 개통 기념 비문(1970), 사직공원의 신사임당 동상 명문과 육영수 여사 묘비문(1974), 류관순 열사 생가 기념비문(1977), 로마교황청 소장 ‘한국 어린이들에게’(정자체 작품, 1984), 종로 보신각 새 종 기념비문(1985), 류관순 열사 사당 현판(1986), 독립기념관 고당 조만식 선생 어록비문(1987) 등을 비롯하여 국내외 박물관, 기념관, 서예관, 학교 등에 많은 한글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그의 후학들은 별세 후 갈물의 유작을 선별하여 1991년에 서울의 백악예원에서 ‘갈물 이철경 추모 유작전’을 개최하면서 『갈물 이철경 서집』을 출간했고, 1999년에는 예술의전당에서 갈물 이철경 10주기 추모 유작전과 함께 『궁체41년, 갈물한글서회사』를 간행하여 그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여 한글서예 발전상을 엿보게 했다. 또 2000년 2월에는 갈물의 맏아들 서기석과 맏딸 서경옥이 주축이 되어 『희망과 정성으로 엮은 세월』이라는 기념문집을 펴내 문필가로의 갈물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발굴해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교육자, 여성운동가, 문필가 등으로 다방면에 걸쳐 여성으로써 선봉에 섰던 삶을 보람과 멋스러움으로 살아오는 한편, 여기(餘技)로 오로지 한글서예 중에서도 정통궁체를 대상으로 하여 작은 글자 쓰기만을 고수하는 작품활동에 전념함으로서 이룩한 큰 공로는 우리 나라 서예 발전사에 영원히 새겨질 것이다.
앞으로도 갈물의 작품세계에 대한 새로운 자료 발굴과 아울러 심층적 연구와 학술발표, 그리고 관련된 전시회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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