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목향 정광옥 한글서예가
  • 목향 정광옥 서예가
신사임당 자료

신사임당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18. 1. 1.

    신사임당

조선 중기의 예술가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이이(李珥)의 어머니로 사대부 부녀에게

요구되는 덕행과 재능을 겸비한 현모양처로 칭송

 

                       

신사임당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던 조선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기정체성을 잃고 남성의 보조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했다. 그나마 사람 대접을 받았던 반가의 여성들도 문밖 출입이 제한되었고 이름 대신 성씨나 당호로 불렸으며, 평생 출산과 양육, 가사 노동에 시달렸다. 교육은 언문이나 깨치게 하는 수준이었고, 좀 나아가면 〈천자문〉, 〈소학〉 등을 통해 기초적인 한자를 습득하고 〈내훈〉류의 계녀서를 읽는 정도였다.

나이가 차면 가문의 결정에 따라 신랑의 얼굴조차 모른 채 혼인해야 했고, 시집 간 뒤에는 남편과 자식들에게까지 여필종부니 삼종지도와 같은 순종의 미덕을 지켜야 했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아도 이혼은 꿈도 꿀 수 없었으며, 남편이 일찍 죽어도 개가는 불가능했다. 유교적 도덕관념을 바탕으로 하는 〈삼강행실도〉나 마을 입구에 세워놓은 정려문이 여성들의 자유의지를 밑바닥부터 옭아매 놓고 있었다.

이런 반가의 여성에 비하여 평민이나 천민 여성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었지만 농사나 가사 등에 국한되었을 뿐 상황은 오십보백보였다. 여성에 대한 교육은 아예 봉쇄되어 있었으므로 낫 놓고 기역 자나 읽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어쩌다 양반의 첩실이라도 되면 그 자식들은 서얼이라는 이름으로 지독한 차별을 당해야 했다.

그렇듯 조선은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였지만 간혹 주머니 속에 송곳처럼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같은 몇몇 여성들이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신사임당은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통해 이룩한 예술적 성취 외에도 남편에 대한 적극적인 내조, 올곧은 자녀 교육을 통하여 진보적인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낸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조선 시대를 통틀어 유교적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현모양처(賢母良妻)’의 표상으로 알려졌고, 오늘날까지도 자애롭고 현숙한 어머니의 이미지만 크게 부각되어 있다.

그림에 뛰어난 자질을 보이다

오죽헌 

               

오죽헌 사랑채, 기둥의 주련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 강원 강릉시 죽헌동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군 10년) 10월 29일 강원도 강릉부 죽헌리 북평촌의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검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오죽헌은 그녀가 훗날 대학자가 된 율곡 이이를 낳은 장소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선비 신명화, 어머니는 용인 이씨이다. 율곡이 외할머니 이씨에 대하여 쓴 〈이씨감천기(李氏感天記)〉에 따르면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는 말은 서툴었지만 행동이 재빨랐고, 모든 일에 신중하되 착한 일을 하는 데는 과단성이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은 없었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신사임당은 그 중에 둘째 딸이었다. 여성을 차별하지 않았던 신명화는 그녀에게 인선(仁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인선은 강릉 오죽헌에 살 때 자신의 거처를 사임당(師任堂)이라고 붙였다. 이 당호에는 고대 중국의 현모양처로 알려진 태임(太任)을 닮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태임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태교를 처음으로 실천했던 여성이었다.

신명화는 강릉의 명가였던 처가의 재력을 바탕으로 16년 동안 서울의 본가에 머물며 과거 공부에 몰두했다. 41세 때인 1516년(중종 11년)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지만 3년 뒤인 1519년(중종 14년) 중종이 기묘사화를 통해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자 실망한 나머지 대과 응시를 포기하고 가족들과 함께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왔다.

신사임당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이사온으로부터 글과 그림을 배웠다. 반가의 여성들이 익히던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외에도 사서삼경(四書三經)과 통감(統監) 등 경전과 고전을 두루 읽어 한학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학문적 소양 외에도 신사임당은 시문과 그림에 특별한 자질을 보였다. 아들 율곡의 회고에 의하면 그녀는 자수도 잘했으며 낙서도 좋아했다고 한다.

신사임당의 그림 솜씨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일곱 살 때였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안견의 산수화를 가져다주자 붓을 들더니 그림을 똑같이 그려냈던 것이다. 이후 그녀는 벌, 나비, 꽃, 개구리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그리면서 화가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명종 때의 학자 어숙권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사임당의 그림을 이렇게 평했다.

‘신씨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배웠는데, 포도나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에 버금간다고 할 정도였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가벼이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겠는가.’

조선 제일의 여류화가

가지와 방아깨비

               

신사임당의 초충도 中 <가지와 방아깨비>

신사임당이 남긴 그림을 살펴보면 매우 섬세하고 여유로운 느낌을 준다. 그림의 주된 소재들은 과일, 난초, 물고기나 새, 풀벌레 등이다. 생활 속에서 섬세한 여성의 눈으로만 관찰될 수 있는 친근한 소재이다. 때문에 그녀의 그림은 정적이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준다.

그녀가 남긴 〈포도도〉는 채 영글지 않은 포도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 있고 큼직한 이파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듯 세련되고 생기가 흘러넘친다. 그래서 율곡은 어머니의 그림이 담긴 병풍이나 족자는 세상에 많이 있는데 포도 그림만은 세상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고 자랑했다. 시서에 정통했던 정유길은 ‘신씨의 포도 그림 병풍의 글’에서 사임당의 포도 그림을 다음과 같이 격찬했다.

규방 안의 동양(東陽)이 빼어나듯
산림 속의 이역 풍경 진기하다.
신령이 응축되어 오묘한 조화를 빚으니
붓이 빼앗아 똑같이 그려냈네.


-〈임당유고(林塘遺稿)〉 상

여기에서 동양(東陽)은 사임당을 가리킨다. 사임당은 평소 자녀들에게 그림 그리는 방법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그림은 단순히 손재주만으로 그릴 수 없다. 우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곤충이든 식물이든 그 대상이 갖고 있는 실체를 확실히 파악하지 않으면, 그림을 그려도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실제로 신사임당은 그림을 그릴 때 잎사귀와 줄기의 느낌 하나하나, 벌레의 다리 끝까지도 꼼꼼하게 그려냈고, 그림 속 물체의 색과 재질까지 특성에 맞게 잘 표현했다.

신사임당의 대표적인 그림 형식인 초충도 중에 원추리와 개구리가 그려진 그림이 있다. 원추리는 산과 들에 군락을 이루어 피는 야생화인데 중국의 고사에 따르면 시름을 잊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신사임당은 화폭 한 가운데에 꽃과 줄기를 그린 다음 위쪽에는 나비가 춤을 추고, 아래쪽에는 먹이를 노려보는 것 같은 개구리 한 마리를 그렸다. 꽃대에는 매미가 배를 드러낸 채 달라붙어 있다. 여러 곤충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평화로운 정경이다.

대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19세 때인 1522년(중종 17년)에 22세였던 이원수(李元秀)와 혼인했다. 이원수는 덕수 이씨 명문가의 후손으로 조부 이의석은 세종대의 부제학 최만리의 사위로 현감을 지냈고, 증조부 이추는 대제학 윤회의 사위로 군수를 지냈지만 부친 대부터 가문이 영락하여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당대에 정승을 지낸 이기, 이행 형제의 조카뻘이었지만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아버지 신명화는 처가살이를 하며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키워줄만 한 사윗감을 찾은 끝에 그를 골랐던 것이다. 덕분에 신사임당은 혼인한 뒤에도 시댁으로 가지 않고 계속 강릉에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해 신명화가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남편이 홀어머니가 계신 서울로 올라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치오르는 슬픔을 삭이며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친 신사임당은 남편의 뜻을 좇아 시어머니가 사는 서울로 이사했다. 당시 신사임당은 늙으신 어머니를 북평 땅에 홀로 두고 대관령을 넘을 때 친정 쪽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서울에 올라온 뒤에도 그녀는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향수에 젖었다.

서울 생활은 고달팠다. 이원수는 아직 과거 공부하는 선비에 불과했기 때문에 변변한 수입이 없었다. 결국 부부는 고심 끝에 대대로 시댁의 터전이었던 경기도 파주군 율곡리로 이사했다. 그 때문에 훗날 아들 이이가 율곡(栗谷)이란 호를 쓰게 된 것이다.

    

자운서원

               

자운서원, 경기기념물 제45호,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그 후 신사임당은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홀로 사는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돌보았다. 그러다 힘에 부쳤던 듯 시댁과 친정의 중간 지점인 강원도 평창에 거처를 마련하고 몇 년

동안 살기도 했다. 38세 때 신사임당은 서울의 수진방에 집을 마련하고 시어머니 홍씨를 모셨다.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산을 절약하여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당시 신사임당은 말투가 온화하고 얼굴빛이 부드러웠지만 남편이 실수하면 반드시 간곡하게 권유하여 고치게 했고, 자녀들의 잘못은 엄히 경계하여 타일렀다. 주위 사람들에게 과실이 있으면 준엄하게 나무랐다. 미천한 노비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1548년(명종 3년)에 13세였던 율곡이 소과에 응시했는데 수많은 선비들을 제치고 장원을 차지했다. 마을 사람들이 신동이 났다며 칭찬했지만 신사임당은 기쁨을 애써 감추고 아들을 단속했다. 자식에게 명성이 걸맞은 인품을 갖추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어머니의 심모원려가 있었기에 율곡은 평생 방종하지 않고 겸양의 도리를 지킬 수 있었다.

1550년(명종 5년) 남편 이원수가 음서(蔭敍)로 수운판관이란 벼슬을 얻었다. 수운판관이란 각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을 나룻배에 실어 한양으로 나르는 일을 하는 벼슬이었다. 이듬해인 1551년(명종 6년) 초에 집을 삼청동으로 옮겼는데, 그 과정에서 마음고생을 했는지 신사임당이 병석에 누웠다. 그해 여름 남편이 맏아들 이선과 셋째아들 이이를 대동하고 관서지방으로 물자를 운반하러 떠났다.

그 사이 환후가 깊어진 신사임당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고 한강변의 여관에 편지를 써 보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사임당은 5월 17일 새벽,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4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이원수와 두 아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와 한강변에 다다랐을 때 가져온 놋그릇이 모두 빨갛게 녹이 슬어 기이하게 여겼다. 그때 서강의 객사에서 사람이 찾아와 신사임당의 부음을 알렸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 때문에 통곡하던 율곡은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신사임당 행장기〉를 지어 그녀의 일생을 세상에 남겼다.

자식들에게 학문과 예술적 재능을 고루 물려주다

오늘날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라고 칭송하고 있지만 기실 그녀는 자상하고 이해심 깊은 아내라기보다는 뛰어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남편과 가정을 이끌었던 능동적인 여성이었다. 자식들에게도 무조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직접 행동과 실천으로 모범을 보였던 적극적인 어머니였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학문을 지도할 때 모르는 것이 있으면 우선 자신이 먼저 공부하여 이해한 다음에야 가르쳤다. 나이 들어서는 자식들과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우쳐주었다. 가정생활에 있어서도 남편의 권위에 무조건 고개 숙이지 않고 마주앉아 토론함으로써 이치에 맞는 결과를 도출해 냈다. 그처럼 신사임당은 자식들에게 인생의 스승이자 친구였고, 남편에게는 고답적인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했다.

언젠가 남편 이원수가 과거 공부를 게을리 하자 가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당신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겠다고 협박했고,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 동안 따로 살자며 절간으로 쫓아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원수는 3년 만에 서책을 덮은 다음 당숙인 영의정 이기를 찾아가 벼슬을 구하려 했다. 신사임당은 당시 이기의 정체를 직시하고 남편을 극구 만류함으로써 장차의 화를 예방하기도 했다. 이기는 훗날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인물이다.

신사임당은 혼인한 지 3년만인 21세 때부터 맏아들 선(璿)을 필두로 5남 3녀를 낳았다. 26세 때 맏딸 매창(梅窓)을 낳았고, 33세 때인 1536년(중종 31년)에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낳았다. 그런데 율곡이 훗날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엄청난 위상에 다다랐으므로 유림에서는 그를 키워낸 신사임당을 어머니의 모범으로 현양했고,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인식하게 된다.

신사임당의 예술적인 재능을 물려받은 자식은 맏딸 매창과 넷째아들 우였다. 특히 매창은 시서화에 두루 뛰어나 ‘여중군자(女中君子)’에 ‘작은 사임당’으로 불렸는데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조대남과 혼인했다.

넷째아들 우(瑀)는 시와 글씨, 그림에 거문고에도 뛰어나 ‘사절(四絶)’이라 칭송받았다. 그는 어머니의 화풍을 닮아서 식물과 곤충 그림을 잘 그렸다. 한 번은 그가 풀벌레를 그린 종이를 길에 던지자 닭들이 진짜 벌레인 줄 알고 달려들어 쪼았다고 한다. 율곡은 이런 동생의 재능에 대하여 ‘내 아우로 하여금 학문에 종사하게 했다면 내가 따르지 못하였을 것이다.’라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벼슬살이도 순탄해서 정3품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군자감은 군사 물자를 취급하는 관청이고 군자감정은 이 기구의 책임자였다. 나머지 자식들은 아버지를 닮았던지 평범한 삶을 살았다. 맏아들 이선은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 뒤 종9품 참봉을 지냈을 뿐이다.

아주 특별한 토론

이원수는 아내인 신사임당의 학문과 인품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의 뜻을 대부분 받아들였던 온후한 남편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가부장적인 전통을 답습하면서 살아온 양반의 후예인지라 매사에 일처리가 분명한 아내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 힘에 겨웠던지 주막집 여인이었던 권씨를 첩으로 삼고 따로 방을 얻었다.

권씨는 근엄하고 현학적인 신사임당과는 달리 매우 자유분방한 여인이었다. 술을 좋아해서 수시로 만취하여 주정을 부리기까지 했다. 평생 아내의 그늘에서 숨죽이며 살아왔던 이원수는 이런 그녀와의 일탈을 통해 해방감을 느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무렵 건강이 좋지 않았던 신사임당은 5남 3녀의 어머니로서 자신의 사후에 벌어질 일이 근심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남편을 불러 앉힌 다음 권씨와의 관계를 청산하라고 요구한다. 조선 후기의 작가 정래주가 쓴 《동계만록》에는 당시 두 사람의 토론 장면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신사임당이 《예기》의 가르침을 내세우며 자신이 죽은 뒤 재혼하지 말라고 요구하자, 이원수는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적이 있다며 버틴다. 이에 신사임당은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이며, 공자가 그 부인과 다시 동거를 하지 않았을 뿐 아주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다고 반박한다.

신사임당의 조리있는 답변으로 궁지에 몰린 이원수는 《효경》을 쓴 증자도 부인을 내쫓은 적이 있다며 역공을 펼친다. 그러자 신사임당은 재차 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를 잘못 봉양했으므로 부득이 내쫓은 것이고, 이후 한 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하여 새 장가를 들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원수가 성리학의 종주인 주자의 집안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받아치자 신사임당은 주자가 47세 때 부인 우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아 살림할 사람이 없었지만 다시 장가를 들지 않았다며, 당신도 성인을 본받아 자신이 죽은 뒤에 재혼하지 말라고 설득한다.

물론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픽션이지만, 실제로 신사임당은 동서고금의 고전에 두루 통달했으므로 과거 공부만 해왔던 이원수로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희귀한 부부간의 토론 결과는 좋지 않았다.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뒤 이원수는 권씨를 집안에 들여 평지풍파를 일으켰던 것이다. 권씨는 말씨도 거친 데다 종종 술에 취해 신사임당이 낳은 자녀들을 몹시 구박했다.

맏아들 이선은 이런 권씨에게 반발하여 수시로 말다툼을 벌였다. 무심한 아버지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체했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 실망한 율곡은 1554년, 가출하여 외할머니가 있는 강릉으로 가다가 금강산 유점사의 말사인 마하연에 들어가 1년 동안 승려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녀가 현모양처가 된 까닭은?

충효를 중시하던 유교사회에서 자식들은 출장입상(出將入相)함으로써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것이 최고의 효도였다. 그런데 신사임당은 그 시대의 여성들과는 달리 자존감 넘치는 삶을 살았지만 출세한 아들 율곡 때문에 엉뚱하게도 현모양처의 대명사가 되었다.

신사임당은 생존시에 ‘신씨’, ‘동양 신씨’ 등으로 불리며 명성이 자자한 여류화가였다. 당대의 명사 소세양으로부터 ‘신묘한 붓이 하늘의 조화를 빼앗았다.’라고 칭송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당쟁이 한창이던 17세기경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그녀를 화가가 아니라 서인의 종주로 떠받들던 율곡의 어머니로서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당파의 분쟁을 교묘하게 이용하던 숙종의 환국정치로 인해 입지가 약화된 서인의 결속력을 강화하려는 속셈이었다.

1668년(숙종 14년), 송시열은 우의정 홍중보에게 편지를 보내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신사임당의 묘소를 정비하자고 제안한다. 율곡의 명성에 기대어 국가적인 행사로 어머니 신사임당을 추앙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또 신사임당의 그림에 ‘소나무 정자에서 바둑 두는 승려들이 한가롭네.’라는 발문을 붙인 소세양을 비난하면서 ‘부인의 그림에 승려 운운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라고 주장했다. 신사임당의 그림이 불교와 연관되는 것을 배격하고 유교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화가보다는 대학자 율곡의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려는 뜻이었다. 70세 때인 1676년에는 신사임당의 산수도에 발문을 덧붙이면서 율곡을 낳은 그녀의 덕행을 극구 찬양했다.

“신 부인의 어진 덕이 큰 명현을 낳으신 것은 저 중국 송나라 때 후부인이 이정(二程) 선생 선생을 낳은 것에 비길 만합니다. 후부인의 행장에 의하면 부인은 ‘부녀자들이 글이나 글씨를 남에게 전하는 것을 마땅치 못하게 여겼다’ 했는데 신부인의 생각도 그와 같았을 것입니다.”

송시열은 그렇듯 율곡을 낳은 신사임당을 주자의 성리학에 큰 영향을 끼친 유학자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의 어머니 후씨(侯氏)에 비견함으로써 ‘소중화(小中華)’를 품고 살던 조선 유학자들에게 무한한 존경의 염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결과 송시열의 의도대로 신사임당에 대한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새롭게 창출되었고, 그 관념이 유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조선 사회에 단단히 뿌리내렸던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