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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운동

여성독립운동가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19. 7. 9.

1.jpg 잊지말고 기억해야 할 女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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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독립군 
“한국의 젊은 남녀들이 이상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그 투쟁에서 학교를 갓 나온 소녀들이 중요한 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면 너도 마음이 끌릴 것이다.” 인도의 민족지도자 네루는 그의 딸에게 옥중에서 196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딸 인디라가 위대한 민족의식을 가지도록 독려하기 위해 3·1만세운동에 참가했던 우리나라 여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했다고 한다.
3·1만세운동은 한국 여성들에게 중요한 정치적 전환점이 됐다. 당시 여성들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로부터 고문을 받아 장애인이 된 경우가 많았다. 당시 외신이나 외국 선교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일제에 체포된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 성추행 등이 다반사였다. 일제가 자주 사용한 고문 방법 중 하나는 ‘소좆 몽둥이(소의 생식기를 뽑아 말린 것)를 물에 불려 여성 음부에 삽입’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에도 3·1만세운동은 여성들의 정치적 의식을 성장시키고 발전시킨 계기가 됐으며 이후 여성들의 정치·사회 참여를 가속화시켰다. 많은 여성단체들이 조직되어 여성의 권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활동을 벌였고 그 활동이 항일운동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해 나아갔다.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로 선정하여 포상된 인물은 모두 14,197명에 달하는데, 그 중 여성은 263명(1.85%) 남짓이며, 그 공로나 활약 상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름도 사진도 없는 여성 독립가들이 부지기 수이며, 기억을 하더라도 남성 운동가의 보조나 허드렛 일하는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국내에서, 국외에서 굳은 의지와 혼신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온 자랑스런 우리의 영웅들이다.
1895년 을미의병전쟁에서 윤희순은 “안사람 만만세로다”를 외치며 ‘안사람 의병가’를 통해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라고 말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 여성들은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 된 도리에는 남녀의 차이가 없는 것인데…. 여자는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 방법을 논하지 않아서 우리는 폐물로서 참여하겠다.’라고 하면서 이 운동을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시켜 나아간 역사의 주인공 들이다.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됐을 때 여성들은 여자광복군으로 활동했다. 당시 항일 운동가들은 가족 단위로 항일운동에 나선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동한 정현숙, 오희영, 오희옥 등을 들 수 있다. 정현숙은 어머니였으며 오희영과 오희옥은 자매였다.




대한제국과 식민의 시대에 여성들은 1898년 ‘여권통문’을 통해 인간권리선언을 하면서 여성으로서의 권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매진했다. ‘여성과 남성은 똑같은 인간인데 그 차이를 보게 된 것은 교육 때문이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교육을 받는 일만이 남녀 동권(同權)을 갖게 되는 유일한 길’이라며 여성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침탈로 여성들은 항일운동에 적극 나서면서 여성도 국가의 시민이라는 것을 천명했다.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됐을 때 여성들은 여자광복군으로 활동했다. 당시 항일 운동가들은 가족 단위로 항일운동에 나선 경우가 많았다. 독립투사들의 밥을 해주거나 비밀 연락망의 구성원이 되기도 했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한 삯바느질, 고무공장 직공노릇 등 갖은 노동을 마다 않고 모성적 희생과 투지력으로 일제 치하에서 한국 독립을 위해 큰 역할을 하였다.
계속해서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일제 압제의 그늘에서 저항해온 여성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의 어머니, 아내, 딸들의 역할을 계속해서 발굴하여 그 역사적 위상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동한 정현숙, 오희영, 오희옥 가족, 지청천의 딸 지복영, 한국 최초의 여 비행사 권기옥, 여성 독립투사 남자현이 대표적인 여성 독립군이다.
34살 임신한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 의사, 미국과 조선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하고, 2.8독립 선언에 참가했던 김마리아 선생도 적극적인 독립운동가였다.
정현숙 (일명, 정정산, 1900-1992) 역시 중국에서 독립군의 뒷바라지와 비밀 연락임무를 수행했으며,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분이다. 
첫 째 딸 오희영 (吳熙英, 1924-1969)과 사위 신송식은 민족 혁명당원으로서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 제1과 광복군 참령(參領)으로 복무한 애국지사이다. 
둘 째 딸 오희옥(吳熙玉 1926~생존) 애국지사는 한국 광복 진선 청년 공작대원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권회복의 일념을 품고 의병항쟁 활동을 한 시아버지 오인수 의병장, 남편 오광선 장군, 해주 오씨 집안의 3대에 걸친 항일 운동은 대한민국 독립 투쟁의 역사와 함께 길이 빛날 것이다.


을사늑약 이후 구국운동의 한 흐름으로 전국에 수많은 사립 여학교가 생겼다. 여학생들은 학교에서 다양한 모임을 통해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공유했다. 그 결과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여학교 내에서는 항일의식을 지닌 수많은 비밀 결사단체가 조직될 수 있었다. 1913년 교사 황애덕의 주도하에 결성된 평양 숭의여학교 송죽결사대가 대표적인 예다. 송죽결사대원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지부를 만들어 점조직 형태로 활동했다. 황애덕은 도쿄에서 3·1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2.8독립선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각지에 흩어져 있던 결사대원들의 활동은 1919년 3·1운동 당시에 많은 여성이 거리로 뛰쳐나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0년대와 30년대를 거치며 독립군 내 남녀 간의 역할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1919년 맹산 독립단을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조신성과 1925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시도하다 만주로 망명한 남자현은 여성들이 남성 못지않은 용기와 전투력을 갖고 있음을 몸소 증명했다.
한국여성동맹은 1940년 6월 17일, 충칭에서 결성됐다. 통합 한국독립당 산하단체로 조직되었으며, 임시정부 활동 지원과 동포 여성 및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 힘을 쏟았다. 정정화는일파 엄항섭의 부인 연미당 등과 함께 이 단체의 주축이었고, 임정 요인들의 자녀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3․1유치원 교사로도 일했다.
1940년 9월 중국 중경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직속 부대인 한국광복군(이하 광복군)이 창설됐다. 광복군에는 여성들도 참여하였는데, 최초의 여성군인 탄생이다. 
지대별로 여성대원이 30명씩은 존재했다. 여성 광복군은 남성과 같은 수준의 군사 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광복군 모집 활동 △선전활동 △첩보활동 등을 수행했다. 일선에서 전투를 벌이는 여성대원도 많았다.
한편, 1943년 2월에는 한국애국부인회가 결성됐다. 한국애국부인회는 1919년 상해에서 창립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재건조직이었으며, 국내외 여성들의 독립의식 고취,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며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했다. 정정화는 훈련부장을 맡았고, 정신대에 끌려갔다가 독립군에게 구출된 여성들의 재활을 보살피기도 했다.
2월 출범한 애국부인회의 선언문이다.
"지금 우리 민족해방운동은 공전의 혁명 고조를 타고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30여 동맹국이 모두 우리 우군이 되어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임시정부 소재지에 있는 (중경의) 혁명 여성들은 당파나 사상을 묻지 않고 일치단결하여 애국부인회를 재건함으로써 국내와 세계 만방에 산재한 일천 5백만 애국여성의 총 단결의 제1성을, 그리고 3천만 대중이 쇠와 같이 뭉쳐서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대한독립과 민족해방 완성의 제1보를 삼으려 한다."
2017년, 국가보훈처는 3․1만세운동 98주년을 맞아, 김병인(金秉仁, 광북군 총사령부 참모 이준식의 부인), 이숙진(李淑珍, 임시정부 군무총장 조성환의 부인), 오건해(신건식 부인), 이헌경(민필호 어머니), 김수현(이광 부인), 윤용자(이청천 부인) 등 여섯 분의 한국혁명여성동맹 간부들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로써 한국혁명 여성동맹 및 한국독립당 활동으로 상을 받은 독립유공자 포상자는 기존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조용제, 송정헌, 이순승, 정현숙, 최형록, 오영선 여사 등을 포함 총 12명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누가 먼저 떠오르시나요?


김구, 안중근, 서재필, 안창호 등 아마 대부분 남성일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이는 대일항쟁기 당시 사회적 제약으로 여성들에 비해 남성들의 외부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여성들이 있습니다. 3∙1운동의 선두에 서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던 유관순 열사부터 간우회를 조직해 일제에 저항한 박자혜 등. 오늘은 여성의 몸으로 남자 못지 않은 용기로 나라사랑을 실천한 대한민국 여성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 지도자 ‘윤희순’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1896년 단발령이 발표되자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춘천에 있던 윤희순 선생의 시아버지인 유홍석도 춘천유림들과 함께 의병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이때부터 윤희순 선생도 의병운동에 뜻을 두기 시작했는데요. 유홍석이 의병부대활동으로 열달간 집을 비운 사이, 의병부대가 마을로 들어와 밥을 요구하면 윤희순 선생은 가족들이 먹어야 할 곡식까지 몽땅 털어 저녁밥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윤희순 선생은 마을 여성들을 모아놓고,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의병을 함께 도울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에게 의병활동을 촉구하였습니다.


1907년 다시 의병이 일어나고, 윤희순 선생은 을미의병 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후기 춘천의병에 참여했던 의병장의 부인, 고흥 유씨 집안의 여성들, 그리고 향촌 여성들 76명으로부터 군자금 355냥을 모집하여 의병에 사용할 탄약 제조소를 운영하였다고 해요! 뿐만 아니라 가정리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을 조직하여 취사와 세탁을 도맡아 하는 등 의병훈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습니다.


선생이 지은 의병 가사 중 [안사람 의병의 노래]와 [경고한다 오랑캐들에게] 사본

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또한 윤희순 선생은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제작하여 구국활동을 촉구하기도 하였는데요. 당시 선생은 자신이 지은 의병가와 경고문을 따라 부르게 만들어 자녀들, 마을 청년들, 새댁들이 모두 의병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이뤄내기도 했답니다.


윤희순 선생은 1911년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 등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했는데요. 이 때 선생은 항일 인재 양성을 위해 노학당을 창립하지만, 일제의 간섭으로 노학당은 폐교되고 맙니다. 이후 시아버지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선생은 무순 포가둔으로 이동, 조선독립단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요. 조선독립단은 선생의 뒷받침 하에 아들 유돈상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일생을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으로 헌신한 윤희순 선생은 아들 유돈상이 순국한지 11일 후인 1935년 8월 1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안주인, 정정화 선생

     

독립운동을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정정화 선생. 1920년 상해로 망명한 정정화 선생은 1946년 귀국하기까지 생활 대부분을 임시정부 요인들의 뒷바라지에 바쳤습니다. 백범 김구는 물론 석오 이동녕, 성재 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주며 말없이 정성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입니다.

 

 

 


선생의 활동에는 남편 김의한의 영향이 컸는데요. 개화파 집안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김의한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얻었으며 우리에게도 독립의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정정화 선생에게 자주 해주었다고 합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선생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로부터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선생



1919년부터 정정화 선생은 서울에서 상해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였는데요. 다섯 번 째 국내 잠입을 끝낸 후 1925년 6월 상해로 돌아왔을 때 임시정부는 그야말로 간판만 있는 형세였습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과 대립으로 임시정부의 위상은 크게 손상되었던 것인데요. 이같이 어려운 시기에도 정정화 선생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수발을 들며, 임시정부의 가장 어렵고 배고팠던 시기를 함께 보내게 됩니다. 


이후 임시정부를 안으로 도우며 활동을 하던 정정화 선생은 1935년 임시정부 여당으로 창당된 한국국민당에 공식적으로 처음 가입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정화 선생과 임시정부의 연은 계속 되었는데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국민당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우익 3당의 통합논의에서 이운환이 쏜 권총에 맞은 임시정부 요원들의 뒷바라지를 정정화 선생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맏어른이자 영도자였던 이동녕 선생을 간호하며 임종을 지킨 분도 바로 정정화 선생이었습니다.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1940년 6월 17일).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정화 선생.]



이외에도 정정화 선생은 한국애국부인회의 집행부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물론, 광복 후 김구 선생과 한국독립당 신국가 건설 노선을 지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여자 안중근,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 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일평생을 오로지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영을 위해 싸운 남자현 여사의 유언입니다.


 

 

 



1872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품성이 단정하고 총명하였던 남자현 여사는 19세 김영주와 단란한 생활을 꾸몄으나, 김영주는 일제의 만행에 영양의병장 김도현 의진에서 왜군과 전투 중 전사하고 맙니다.


남자현 여사는 46세 되던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 구국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고 중국으로 이주하였는데요. 이후 서로군정서에 가입하고 북만주 일대를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건립하였으며 여성계몽에도 힘써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 주력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1925년 남자현 여사는 직접 사이토 마코토 총독 주살을 추진하기도 한 인물인데요. 안타깝게도 이 거사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 용기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에 크나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남자현 여사 항일구국비/출처:두산백과]



이 외에도 남자 못지 않은 남자현 여사의 독립을 위한 활동은 끊이질 않았는데요.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한 여사는 왼쪽 무명지 2절을 잘라 ‘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마디와 함께 조사단에게 전달 해 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인식시키기도 했습니다.


1933년 초 남자현 여사는 주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무등신의를 제거하기 위해 거지로 변장하지만, 이를 미행하던 일본영사관에서 붙잡혀 감금되었습니다. 이후 죽기로 결심한 남자현 여사는 15일간 단식투쟁을 벌였고 6개월간의 혹독한 구문과 옥중 생활로 1933년 8월 22일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남자현 여사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하였으며, 지금까지도 남자현 여사의 공로는 찬란한 빛을 이어오고 있답니다.




여성의 몸으로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던 대한민국의 여성들. 이처럼 나라사랑 앞에는 나이가 없고 성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성독립운동가는 남성독립운동가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인데요. 여성독립운동가들도 미래를 짊어져 갈 많은 아이들에게 좋은 교훈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출처: https://mpva.tistory.com/2157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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