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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향 정광옥 한글서예가
  • 목향 정광옥 서예가
강원의 얼 선양

노을빛 치마에 감긴 다산 부부의사랑 하피첩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18. 8. 18.

출처 한겨레일보

노을빛 치마에 담긴 다산(茶山) 부부의 사랑

등록 :2016-10-15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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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아내 홍씨부인 ‘혜완’
생이별한 남편 못내 그리워
34년전 혼례식 때의 다홍치마
님 머무는 다산초당에 보내

붉은빛 사라져 색 바랬어도
치마에 담긴 ‘나를 잊지 마오’
아내 속뜻 알아차린 다산
아들 주는 책 만들어 화답

붉은치마 자투리 남겼다가
매화가지에 두마리 새 그려
시집간 외동딸에게 선물
새 한마리 ‘매조도’ 따로 남겨

을축년 홍수 때 구한 하피첩
6·25 피난 와중에 사라져
2006년 티브이 프로에 깜짝 등장
17일부터 남양주 실학박물관 전시
다산 정약용의 7대 종손 정호영씨가 14일 낮 경기 남양주 실학박물관에서 206년 만에 돌아온 정약용의 하피첩을 일반 공개에 앞서 살펴보고 있다. 하피첩은 다산의 유배지로 부인 홍혜완이 혼례 때 입었던 붉은 치마를 보내자, 이를 잘라 아들들에게 주는 훈계의 글을 담은 책이다. 원래는 4권이었으나 6·25 때 분실된 뒤 2006년 3권만 다시 나타났다. 남양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다산 정약용의 7대 종손 정호영씨가 14일 낮 경기 남양주 실학박물관에서 206년 만에 돌아온 정약용의 하피첩을 일반 공개에 앞서 살펴보고 있다. 하피첩은 다산의 유배지로 부인 홍혜완이 혼례 때 입었던 붉은 치마를 보내자, 이를 잘라 아들들에게 주는 훈계의 글을 담은 책이다. 원래는 4권이었으나 6·25 때 분실된 뒤 2006년 3권만 다시 나타났다. 남양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특집

하피첩, 206년 만의 귀향

▶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아내는 30여년 전 혼례식 때 입었던 붉은 치마를 유배지의 남편에게 보냈다. 남편은 치마를 잘라 자식들에게 주는 책으로 만든 뒤 노을빛 치마라는 뜻의 ‘하피첩’(霞?帖, 보물 1683-2호)이라고 이름붙였다.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과 그의 아내 홍혜완의 애틋한 사랑이 담긴 하피첩이 치마의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에서 처음 공개된다. 206년 만이다. 남양주 실학박물관의 ‘하피첩의 귀향’ 특별전은 오는 17일부터 내년 3월26일까지 열린다. 다산이 시집간 딸에게 그려준 ‘매조도’(고려대 박물관 소장) 등 관련 유물 20점도 함께 선보인다.

홍혜완은 장롱 속 깊이 보관하고 있던 낡은 치마를 꺼냈다. 1776년 다산(정약용)과 혼례를 치를 때 입었던 다홍치마였다. 열여섯살 어린 신부의 수줍은 볼처럼 붉게 빛났던 다홍색은 거의 사라지고 겨우 불그스레한 흔적만 남았다. 색 바랜 치마를 무릎 위에 올려놓자, 30여년 전 혼례식 때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혼인은 혜완의 아버지(홍화보)가 같은 남인인 다산의 아버지(정재원)와 뜻이 맞아 정했다. 홍화보의 외동딸인 혜완은 한양의 남산골에서 나서 곱게 자란 서울 아가씨였다. 유교적 소양을 갖춘 무관인 홍화보는 전해에 승정원의 동부승지에 임명됐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의 비서관 격이니 한가닥 하는 집안이었다. 반면에 신랑은 배를 타야 갈 수 있는 광주군 추부면 마현(현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시골 사람이었다. 한때 8대 옥당 가문(학문적·문화적 중심기구인 홍문관의 고관을 낸 집안)이라고 이름날 정도의 명문가였지만, 다산의 5대조부터는 남인에 대한 박대로 3대째 벼슬을 하지 못한 몰락한 양반가였다. 다산의 아버지에 와서야 겨우 능참봉을 거쳐 형조좌랑과 연천 현감 등 낮은 벼슬자리를 하기 시작했다.

새신랑인 다산은 혜완보다 한살 어린 열다섯살의 소년이었다. 깨끗이 차려입었지만, 시골 총각 티가 역력했다. 다산은 12살까지만 해도 머리에 서캐와 이가 득실거리고 부스럼이 많은 아이였다. 큰형수와 서모는 틈만 나면 어린 다산을 앉혀놓고 정성스레 씻겨주고 빗질해줬다. 그러나 맞절할 때 살짝 본 신랑의 눈은 새벽별처럼 반짝였다. 그날의 영롱한 눈빛을 생각하면 사촌 오라버니 홍의호가 새신랑을 시험하려다가 되치기당한 일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홍의호는 다산이 키가 작고 어린 것을 겨냥해 “사촌 매부는 삼척동자로다”(四寸妹夫 三尺童子)라고 짐짓 놀렸다. 다산은 처가의 위세에 눌리기는커녕 “중후의 손자께서는 경박한 자손입니다”(重厚之孫 輕薄之子)라고 응수했다. 홍의호의 할아버지 이름(홍중후)을 빌려 사촌 처남을 오히려 골려먹었다.(야담집 ‘기리총화’)

호박 훔친 여종을 매질한 혜완

다산의 총명함은 조선 팔도에 익히 소문이 났다. 다산 스스로 “어려서부터 영특했고 글에도 뛰어났다”(‘자찬묘지명’ 집중본)고 했다. 4살에 천자문을 배운 그는 7살에 산(山)이라는 제목의 한시를 지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小山蔽大山)

멀고 가까움의 지세가 다른 탓이지(遠近地不同)”

글재주도 재주려니와 사물의 이치를 꿰뚫는 생각의 깊이에 주변 사람들은 더 놀랐다. 다산의 문재가 얼마나 뛰어났던지 10살 이전에 지은 시만 따로 모은 ‘삼미자집’(三眉子集)이 장안의 화제였던 적도 있었다. 천연두를 앓았던 다산이 오른쪽 눈썹 위에 생긴 흉터로 인해 눈썹이 세 갈래로 나뉜 것처럼 보여서 삼미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던 데서 따온 이름이었다.

1810년 새해가 밝았는데도 혜완은 도통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신유박해(1801년) 때 천주쟁이라는 누명을 쓰고 남편이 경상도 장기를 거쳐 전라도 강진 땅으로 유배간 지도 9년이 흘렀다. 자신은 벌써 쉰살이 됐고, 마흔에 떠난 다산도 마흔아홉살에 접어들었건만 남편이 언제 돌아올지 기약조차 없다. 게다가 강진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혜완의 애간장을 녹였다. 강진에 내려가서 거의 2년 동안 아비와 지내다가 지난 2월에 돌아온 둘째 아들 학유에 따르면, 다산의 건강이 무척 안 좋아졌다. 학유가 강진에 도착하기 직전(1808년 3월)에 강진의 부잣집인 귤동의 윤씨 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다산은 초당에서 고즈넉한 환경에서 학동을 가르치는 등 처음에는 생활이 안정됐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병환이 깊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공부하고 책 쓰느라 몸을 혹사한 까닭도 있지만, 아들이 떠난 뒤 마음이 허해진 탓도 컸다. “학포(학유의 다른 이름)가 돌아간 뒤로 이청(강진 제자 중의 한명)만 곁에 있었다. 산은 고요하고 날은 긴데 마음 기댈 곳이 없었다. 나는 당시 풍증으로 몹시 힘들어서 정신이 맑지 않았다.”(시경강의 12책 서문) 팔다리에 마비 증세까지 나타난 다산은 아들한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죽으면 강진에 묻었다가 복권이 되고 나면 마재로 옮기라는 유언까지 했다.

혜완 역시 그즈음 몸이 몹시도 아팠다. 그녀는 1801년 2월 남편과 생이별한 뒤 여러번 몸져누었다. 그때마다 다산은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어머니를 잘 보살필 것을 당부했다. 몸이 아픈 혜완은 자칫 생전에 사랑하는 남편 다산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두 아들은 두어차례씩 강진을 다녀왔지만, 자신은 몸이 아파 한번도 못 가본 것이 한으로 다가왔다.

“집을 옮겨 남쪽으로 내려가

끼니라도 챙겨드리고 싶으나

한 해가 저물도록 병이 깊어져

이내 박한 운명 어쩌리까

이 애절한 그리움을

천리 밖에서 알아주실는지”(홍혜완이 1807년 겨울에 강진의 다산에게 보낸 시(기강진적중·奇康津謫中)의 일부, <동아일보> 1935년 7월16일 3면)

꿈속에서도 여인의 유혹 물리치다

혜완은 빛바랜 치마를 곱게 접어서 보자기에 쌌다. 편지와 함께 강진에 있는 남편에게 보냈다. 그동안 남편의 옷을 만들어 보내거나, 평소 좋아하는 찰밥을 지어 보내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허전했다. 다른 여인들도 하는 남편 돌보는 일 말고, 자나깨나 그리운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몇달이 걸려서 오가는 편지, 그것도 남의 눈을 의식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글로는 늘 부족했다. 혹여 딴 여자에 눈길을 줄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뜻도 전하고 싶다. 워낙 윤리적이고 가정적인 사람이라 자기 관리에 엄격하지만, 따로 떨어져 산 지가 10년이 가까워오면서 남편에 대한 의심도 때때로 생겨났다.

아내의 혼례 치마를 받아든 다산은 흠칫 놀랐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사대부 집안의 부인이 자신이 입던 치마를 남정네에게 보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다산은 이내 ‘우리 처음 만났던 그날의 초심을 잊지 마세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는 뜻이 치마에 담겼음을 알아챘다. 혜완은 시골로 시집와서 ‘농사짓고 누에 치는’ 촌 아낙이 됐지만, 원래 인품이 강직하면서도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났다. 남편을 그리워하는 한시를 보내와서 다산이 눈물짓기도 했다. 다산이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때(1784년)였다. 혜완은 첫돌이 되지 않은 첫아들(학연)을 데리고 마재 고향집에 머물고 있었다. 집안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여종이 이웃집 밭에서 호박을 하나 따 와서 죽을 끓였다. 그 사실을 알고는 회초리로 여종의 종아리를 쳤던 여인이었다.(다산의 시 ‘호박넋두리·南瓜歎’)

아내의 치마를 앞에 놓은 다산은 숙연해졌다. 물론 3년 전(1807년) 첫 손주(대림)를 본 이후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있던 참이긴 했다. 하지만 한창나이인 그에게 때때로 육체적 욕망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난해(1809년) 11월6일 밤 꿈속의 일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날 다산은 평소대로 제자들을 다산초당의 서쪽에 있는 서암에 재우고, 자신은 거처인 동암에서 혼자 잠이 들었다. 한밤중 꿈속에 한 어여쁜 여인이 찾아와 장난을 걸었다. 그 또한 마음이 잠깐 동했지만, 이내 사절하고 여인에게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다. 꿈속 기억이 너무 또렷해 다산은 깬 뒤에 이 일을 시로 남겼다.

“눈 온 산 깊은 곳에 한 가지 꽃이 피니

붉은 깁에 둘러싸인 복사꽃보다 낫다

이 마음은 금강의 쇳덩이로 되었나니

풍로가 있다 한들 네가 나를 어이하리”

이처럼 꿈속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였다. 그러니 혜완의 치마에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들지는 않았다. 허나, 아내가 보고싶을 때마다 치마를 꺼내 쳐다보는 것은 민망한 일이었다. 그런 모습을 제자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체면이 서지 않을 것 같았다. 치마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그에게 몇년 전부터 틈날 때마다 두 아들에게 몸가짐 등에 대한 훈계(가계·家誡)를 적어 보내던 일이 떠올랐다. 무릎을 쳤다.

가슴속으로만 간직한 아내와의 추억

다산은 즉시 가위와 다리미를 구했다. 치마를 작은 책자를 만들기에 알맞은 크기로 재단해서 자르고, 반듯하게 다림질을 했다. 이어 치마 조각을 한지에 붙이고는 틈틈이 아들들에게 주는 글을 비단에 적었다.

“경직의방(敬直義方)”(공경으로 마음을 바로잡고, 의로써 행동을 반듯하게 하라.)

“근면은 부를 생산하고, 검소는 가난을 구제한다.”

“나는 전원을 너희에게 남겨줄 만한 벼슬은 하지 않았다. 오직 두 글자의 신성한 부적이 너희의 삶을 넉넉히 할 것이기에 남긴다. 소흘히 여기지 마라. 하나는 근(근면)이요, 다른 하나는 검(검소)이다. 두가지는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보다 낫다.”

“재물을 저장하는 것은 남에게 베푸는 것보다 못하다. …단단히 잡으려 할수록 더욱 미끄럽게 빠져나가니 재물이란 메기와 같은 것이다.”

근검과 나눔, 베품도 강조한 내용으로 7월에 첩 두권을 만들었다. 두달 뒤에 두권을 더 만들었다. 4권의 책으로 변한 혜완의 치마가 마재 집으로 보내졌다. 책머리에는 그 사연을 담았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 살고 있는데 병든 아내가 다섯폭짜리 낡은 치마를 부쳐왔다. 시집올 때 입은 분홍빛 활옷이다. 붉은빛은 이미 바래 옅은 황색이 되었다. 서본으로 쓰기에 맞춤했다. 잘라서 작은 첩을 만들고, 손길 따라 훈계의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준다. 훗날 글을 보고 감회를 일으켜 양친의 꽃다운 은택을 떠올린다면 뭉클한 느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으리. 이름하여 하피첩이다. 붉은 치마를 바꿔 말한 것이다.”(1810년 초가을)

하피는 원래 궁궐의 비나 빈이 입던 치마를 말한다. 따라서 붉은 치마 즉, 홍군(紅裙)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이 말에는 기생이라는 뜻도 있어 다산은 ‘하피’(霞?)라고 이름지었다. 자녀들에게 부모의 은혜를 기억하라고 당부하는 말을 서문에 썼지만, 사실은 사랑을 확인하려는 혜완에게 보내는 우회적인 답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곧 당신에 대한 사랑이오. 그러니 나를 의심치 마오.’ 하피첩을 본 혜완도 그 뜻을 헤아렸을 것이다. 다산은 평소에도 아내에게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기껏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머니 방이 따뜻한지 살피고,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고, 부드러운 낯빛으로 대하라”는 당부를 미주알고주알 할 뿐이었다. 아내 혜완에게 바치는 시(금강을 건너며·渡錦水)는 강진으로 유배갈 때 딱 한번 쓴 적이 있긴 했다. 결혼 이듬해(1777년) 겨울 아버지가 전라도 화순 현감으로 부임하자, 다산은 아내와 함께 금강나루를 건너 화순으로 갔다. 그때 아내와 금강나루를 건넜던 추억을 소재로 시를 지었다. 둘만 아는 다정했던 내용은 가슴속에 담았을 뿐 시는 밋밋하게 썼던 그였다.

혜완을 낙담시킬 또다른 매조도

다산은 하피첩을 만들고 남은 치마 천 조각을 잘 보관해 뒀다. 1801년 신유박해로 유배를 떠날 때 8살이던 막내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812년 딸은 자신의 강진 제자 중 한명인 윤창모와 혼례를 올렸다. 다산은 혜완의 치마 자투리를 꺼내 이번에는 벽걸이 그림으로 맞춤할 정도(가로 19㎝, 세로 45㎝)로 잘랐다. 이어 붓을 들어 매화 가지에 꽃을 그리고, 두마리의 멧새도 그려넣었다.

“펄펄 나는 저 새가

내 뜰 매화에 쉬네

꽃다운 향기 매워

기꺼이 찾아왔지

머물러 지내면서

집안을 즐겁게 하렴

꽃이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많겠구나”(1813년 7월14일)

후손을 많이 낳고 다복한 가정을 이루라는 기원을 담았다. 죄인 신세에 가진 것도 별로 없는 그가 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결혼 선물이었다. 그림 한켠에는 이 매조도(고려대 박물관 소장)를 그리게 된 사연을 적었다. 혜완의 치마에서 유래됐다는 내용이 하피첩과 같다. 혜완의 빛바랜 다홍치마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한달쯤 뒤(8월19일) 또 하나의 매조도(개인 소장)로 변했다. 다산은 이번에는 새를 한마리만 그렸다. 이 그림은 당분간 자신이 간직할 참이었다. 다른 여인을 품지 않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혜완에게 지키지 못한 것과 관련된 그림이었다. 그러고도 남은 치마 조각이 있었다. 이번에는 강진의 제자 중 시를 가장 잘 짓는 황상(1788~1870)에게 주는 첩을 만들었다.(1814년 5월) 크고 작은 28개의 비단 자투리에 사치와 교만을 멀리할 것과 자급자족의 생활을 할 것, 삶의 정취를 가꿀 것 등을 당부하는 글을 적었다.

다산은 1818년 9월 유배가 풀려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혜완과는 마흔에 헤어진 뒤 환갑을 눈앞에 둔 노인이 돼서야 다시 만났다. 고향집에서 다산은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의 책을 마무리하거나 주변을 여행하면서 혜완과 여생을 함께했다. 결혼 60주년인 회혼식(1836년 2월22일)을 며칠 앞두고 다산은 혜완과 함께해온 60년을 되돌아보는 시(회근시·回?詩)를 썼다.

“눈 돌리는 사이에 예순 해가 지나가니

복사꽃 짙은 봄빛 신혼 때와 비슷하네

(중략)

이 밤에 목란사는 가락이 더욱 좋고

그 옛날의 하피첩엔 먹자국이 남았구나(후략)”

둘이 함께한 60년 세월의 꽃은 역시 하피첩이었다. 다산은 회혼일 아침에 75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혜완은 2년 뒤 다산을 따라갔다. 혜완은 마재 집 뒤의 언덕에 묻힌 다산과 합장됐다.

목숨 걸고 다산 저작물 구한 4대손

가보로 다산 후손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던 하피첩은 다산이 숨진 지 100년째인 1925년 첫번째 위기를 맞는다. 일제 강점기인 이해 여름 큰비(을축대홍수)가 내렸다. 다산 고택인 마재의 여유당에까지 피해가 닥쳤다. 여유당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치는 두물머리에 있었지만, 강줄기에서 꽤 떨어진데다가 얕은 언덕 자락에 있어 그동안 아무리 큰물이 지더라도 수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 을축년에는 달랐다. 며칠 비가 내리더니 어느날 밤 여유당의 큰방까지 물이 차올랐다. 다산의 현손(4대손)인 규영은 하피첩과 다산의 저작물이 들어 있는 책 궤짝부터 안방 다락으로 옮겼다. 밤이 깊어지면서 물이 방 안의 허리까지 찼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허겁지겁 대피했으나 규영은 다락으로 달려가 산더미처럼 쌓인 세간더미 속에서 책 궤짝을 끄집어내느라 애를 썼다. 급보를 듣고 온 구조선에서 어서 나오라고 외쳤으나, 규영은 “다산전집을 건져내지 못하면 죽어도 나갈 수 없다”고 소리쳤다. 규영이 겨우 궤짝을 걸머지고 나오자, 배에 기다리던 사람들이 힘을 합해 다산의 기록을 구했다. 밤새 물은 여유당의 용마루까지 차올랐고, 이튿날 여유당 집을 통째로 쓸어갔다.(최익한, <동아일보> 1938년 12월23일)

대홍수에서 하피첩과 다산의 저작물을 아슬아슬하게 구한 규영은 여유당 옆에 작은 집을 짓고 살다가 대홍수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혜완의 치마에 다산의 얼이 서린 하피첩의 수난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5대손인 향진(1968년 작고)은 홍수로 모든 것을 잃은 뒤라 가족을 먹여 살리기가 난망했다. 그는 결국 1930년대 초 가족을 데리고 마재를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 수표교 근처에서 살다가 이후 충북 괴산, 경기도 안산·안양, 서울 영등포 등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1950년 6·25 동란은 하피첩에도 악몽이었다. 서울을 차지한 인민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에 향진은 피난을 가려고 수원역으로 나갔다. 피난보따리에 하피첩도 소중하게 쌌다. 역은 발디딜 틈도 없이 붐볐지만, 기차는 오지 않았다. 향진은 할 수 없이 안양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그는 하피첩이 사라졌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향진은 손자인 호영(58·EBS사업위원)이 어릴 때 무릎에 앉히고는 “내가 피난길에 가보를 잃어버렸다. 하늘에 가서 조상님을 뵐 면목이 없구나”라고 자책하곤 했다. 이후 하피첩은 다산문집에 내용은 있으되 실물은 볼 수 없는 전설의 유물이었다.

2006년 3월 어느날 <한국방송>의 주말 프로그램인 <진품명품>의 문화재 감정위원인 김영복(62·K옥션 고문)은 사진으로 의뢰가 온 세첩의 글씨를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글로만 봤던 다산의 하피첩이었다. 첩의 천과 고려대 박물관에 있는 매조도의 비단을 정밀 감정했다. 낡은 정도와 천의 재질 등이 동일했다. 하피첩이 거의 2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녹화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의뢰인(이강석)은 ‘감정가 1억원 진품’이라는 판정에 녹화 뒤까지 가슴이 벌렁거려 자동차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강석은 수원에서 주로 모텔 리모델링을 전문으로 했다. 뜯어낸 벽지와 종이 등 파지가 많이 나왔다. 2년 전에도 폐지 줍는 할머니가 공사장에 리어카를 끌고 나타났다. 리어카 바닥에 있는 고문서 세 권이 이강석의 눈에 띄었고, 할머니는 폐지를 가져가는 대가로 그 책을 내줬다. 진위가 궁금한 이강석은 <진품명품>의 문을 두드렸다.

김민영의 하피첩 구입 사연

방송이 나가고 몇달 뒤 이강석은 김영복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사업이 잘 안돼 돈이 필요했던 그는 하피첩을 팔 의향을 내비쳤다. 김영복은 중요 문화재를 개인한테 넘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강진군에 먼저 연락했다. 강진군과 이강석 사이에 몇차례 얘기가 오갔으나 가격 차이로 거래가 깨졌다. 김영복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김민영(70·부산저축은행 전 대표)에게 자초지종을 알렸다. 김민영은 “강진군이 사는 게 맞다. 만일 강진에서 사지 않으면 내가 사겠다”고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서지학의 대가이자 문화재 애호가인 김민영은 그 소식에 바로 나서 하피첩을 구입했다. 김민영은 ‘월인석보’를 비롯해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문화재를 많이 사 모으는 등 문화재 수집가로 오래전부터 이름났다. 그는 다른 주요 문화재와 마찬가지로 하피첩도 보물로 등록했다. 자신의 비밀금고에 가두지 않고 공공의 관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2007년 동국대 박물관에서 전시회를 열어 일반인에게 하피첩을 처음으로 공개한 것도 그런 뜻이었다.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가던 하피첩은 2011년 부산저축은행의 횡령 및 부실 대출 사건이 터지면서 검찰을 통해 다시 등장했다. 김민영이 소장한 문화재들이 모두 채권단에 압류됐다. 하피첩은 2015년 9월 경매에 부쳐졌다. 개인에게 다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실상 입찰 자격은 공공기관으로 제한됐다. 민속박물관과 실학박물관이 경쟁한 끝에 7억5천만원을 부른 민속박물관의 품에 돌아갔다. 하피첩의 긴 고난도 드디어 끝이 났다.

※그동안 다산 부인은 이름 없이 ‘홍씨부인’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졌다. 다산도 많은 글에서 부인 홍씨라고만 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씨부인의 이름이 두군데에 남아 있다. 하나는 위당 정인보의 글을 모아놓은 ‘담원 정인보전집’(연세대학교 출판부) 2권 95쪽이다. 위당은 “부인 홍씨의 휘(諱·이름)는 혜완(惠婉)”이라며 “홍씨가 다산이 유배간 지 6년 되던 해에 강진으로 보낸 4언시(奇康津謫中)가 있다”고 적었다. 같은 제목의 시 일부가 <동아일보> 1935년 7월16일치 3면에 실렸다. 여기에도 ‘홍씨 혜완’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날치 <동아일보>에 정인보의 글이 실린 것으로 미뤄, 혜완의 시는 정인보가 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산 연구 제1세대 학자인 정인보는 여유당 전서를 발간(1939년 완간)하느라 다산 종손 집을 드나들면서 수많은 자료를 직접 봤다. 이에 본 기사에서도 다산 부인을 홍혜완으로 적었다. 치마를 강진으로 언제 보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다산이 하피첩을 만든 즈음(1810년 7월과 9월)에 보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 기사에서도 거기에 따랐다.

※이 기사는 <다산 정약용 평전>(박석무),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박석무), <삶을 바꾼 만남>(정민),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정민 외)를 기본 자료로 했다. 또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을 비롯해 정민 한양대 교수,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 김영복 K옥션 고문, 정호영 EBS사업위원,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사, 조운찬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장 등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재구성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인 강진에서 1810년 아들들에게 주는 훈계의 글을 적어 만든 하피첩의 모습. 하피첩은 원래 4첩이었으나, 3첩만 2006년에 발견됐다. 하피첩은 다산의 부인 홍혜완이 보낸 붉은 치마를 잘라 만들었다. 남양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인 강진에서 1810년 아들들에게 주는 훈계의 글을 적어 만든 하피첩의 모습. 하피첩은 원래 4첩이었으나, 3첩만 2006년에 발견됐다. 하피첩은 다산의 부인 홍혜완이 보낸 붉은 치마를 잘라 만들었다. 남양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다산 정약용이 시집간 딸에게 1813년 강진 유배지에서 그려준 매화도. 아내가 보내온 붉은 치마로 하피첩을 만든 뒤 남은 천으로 만들었다. 고려대 박물관 제공
다산 정약용이 시집간 딸에게 1813년 강진 유배지에서 그려준 매화도. 아내가 보내온 붉은 치마로 하피첩을 만든 뒤 남은 천으로 만들었다. 고려대 박물관 제공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가서 1808년 봄부터 1818년 남양주의 고향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거처했던 다산초당의 모습. 다산은 이곳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대부분의 책을 완성했거나 초안을 잡았다. 원래는 초가지붕이었지만, 복원하면서 관리를 편하게 하기 위해 기와지붕으로 지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가서 1808년 봄부터 1818년 남양주의 고향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거처했던 다산초당의 모습. 다산은 이곳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대부분의 책을 완성했거나 초안을 잡았다. 원래는 초가지붕이었지만, 복원하면서 관리를 편하게 하기 위해 기와지붕으로 지었다. <한겨레>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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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65821.html#csidxc5f6d1eb8c9f2daa47cb0c48a0cef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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