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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사랑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09. 12. 13.

(펌) 춘천사랑<매월당(每月堂)의 춘천 10경에 관한 고찰 > 역사 이야기

 

 

매월당(每月堂)의 춘천 10경에 관한 고찰

 

 (출처: 춘주문화 제17호(2002))

최승순(강원대 명예교수)

 

1. 서 언

우리나라의 역사에 남겨진 인물 가운데 후세에 길이 기록되어질 인물이 하나 둘이 아니나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있다.
인물의 평전은 보는 관점, 보는 사람과의 친소(親疎)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더욱이 조선조의 담쟁 이후에는 색목(色目)에 따라서 그 평가에 큰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매월당은 유교를 국시로 하였던 조선조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행적의 사람이다. 유교가 국시였던 사회환경 탓으로 유가로서 어설피 불교를 논하면 그 사회에서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입신의 바탕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상황에서 매월당은 승속(僧俗)을 교관(交關)한 기이한 일생을 살고 간 사람이다. 그는 유가에서 출생하여 유교적 교육을 받아 장차 유가로서 입신 하려 하였고 그의 문집인 '매월당원집' '속집' '외집' '매월당집부록'은 유가문집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내용으로 이 것으로만 그를 평가 한다면 그를 굳이 승려라고 지칭 할 이유가 없으나 그에게는 묘법연화별찬(妙法蓮華別讚)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대화엄일승법계도주(大華嚴一乘法界圖註)의 불교 저작이 있어 유불을 스스럼없이 오갔던 것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행적에서도 한 때는 삭발하고 산사에서 불도에 정진하다가 한때는 환속하여 머리를 기르고 부인을 취하여 세속생활에 몰입한 때도 있으니 그의 이러한 인생행각으로 보아서 그가 범상인이 아니었다는 것은 짐작이 간다.
매월당은 어려서 유가 공부를 하여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강원도지방에 와 있을 때 당시의 양양부사 유자한(柳自漢)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13세 때에 유교의 기본이 될 수 있는 공부는 다 마쳤고 그가 출가하여 산문에 귀의한 것이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20세때에 장가를 들었는데 이 것은 초취로 장가들던 다음 해에 입산하였으니 이후는 승려 생활을 한셈인데 그가 승려라는 것을 뚜렷하게 들어낸 것은 그의 저서 "대화엄범계도주병서"에 "청한비구설잠 주병서"(淸寒比丘雪岑 註幷序)라고 한데서 확연하여 진다. 그러다가 그의 연보에 의하면 47세 때에 머리를 기르고 육식을 하면서 안씨를 처로 맞아 환속하여 속인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렇게 매월당은 확실히 승속을 오갔던 사람이 틀림이 없기에 그 생애도 기구하였다. 그의 재질이 우리역사에서는 드물게 보는 뛰어난 재질이였고 그 행적이 남달라 기이한 인물로 세인의 이목을 끌만하였는데 더욱이 그는 강원도와 특수한 연고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 가운데 강원도를 유랑하면서 이 고장을 글의 주제나 소재로 한 글이 많아 강원도와는 특별한 연고가 있는 인물이다.
매월당집에 의하면 그가 산수를 유력하고 지은 글이 많아 "유관서록" "유관동록" "유호남록" "유금오록" "관동일록" "명주일록"이 다 그의 산수유력기이다. 이 6편 가운데 3편이 강원도 관계의 글들이니 그의 유력행각기문은 반이 강원도의 것이기에 그는 강원도와는 특수한 연고가 있었던 것이다.
매월당이 강원도 여러고을에 시문을 남겼지만 시문을 많이 남긴 곳이 영서에서는 춘천이고 영동에서는 강릉이다. 춘천에서는 "청평산" "소양강" "우두원" "모진" "우두사" "청평사" "고산" "소양정"등 많은 시가 있으나 특이하게 제영(題詠)가운데 "춘천 10경"시가 들어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매월당의 산수유력 행각시 가운데 지역적으로 보았을 때는 강원도가 배경이 되거나 주제나 소재가 된 시가 가장 많다고 하였거니와 여기에는 어떤 까닭이 있겠기에 먼저 매월당과 강원도와의 연고를 살핀 다음으로 본논문의 주제가 "매월당의 춘천 10경"으로 되어 있기에 8경, 10경하는 자연경색의 숫자 형용도 함께 살피기로 한다.


2. 매월당의 강원도 연고

매월당이 강원도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 마는 그는 강릉김씨로 강릉이 관향으로 되어 있어 강원도라는 숙명적인 연고를 가지고 있다. 1889년에 동경에서 오쓰까(大塚)라는 일본인이 발간한 책에는 "김시습은 관산〔光山〕사람으로 어려서 신동이라 일러 와 문종이 만나보려고 했으나 숨어버려 만나지 못했고 어디에서 일생을 마쳤는지 알지 못한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 기록에서는 매월당이 광산김씨로 되어 있으나 이 것은 그릇 된 것이다. 더욱이 이 글이 신빙이 가지 아니하는 것은 문종이 매월당 5세 때에 만나 보려 했다는 구절도 잘못되어 있다. 매월당이 5세 때는 아직 세종연간으로 문종은 등극하지도 아니 하였던 때니 이 글은 잘못되어 있고 강릉김씨 세보나 그 외의 매월당의 모든 전기에 강릉김씨로 되어 있으며 이런 연고로 해서 그의 영당이 강릉김씨시조묘역에 건립되어 오늘에도 제향이 이어지고 있어 그가 강릉 김씨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매월당이 출생은 서울에서 했으나 그의 관향이 강릉이라는 점에서는 그는 숙명적으로 강원도와의 연고를 가지고 있다. 그가 서울에서 태어나서 언제 관향인 강원도에 처음으로 걸음 했는지 그의 문집 만으로는 상고하기 어려운데가 있다. 그는 문집 발간 당시에 만들어진 연보가 없다.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매월당집의 합본인 "매월당전집"에도 각문집의 발간당시의 연보는 없고 다만 이 전집을 만드느라 정병욱교수가 처음으로 그의 연보를 편집한 것이 있을 뿐인데 이 연보에 그가 21세 떄에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었으며 이 때 법호를 설잠(雪岑)이라 했다고 있을 뿐 어느 절에서 삭발 했다는 기록이 없다.
강릉이 관향인 탓으로 어려서 이 곳을 오간 일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13세까지 서울서 살다가 이해에 모친상을 - 다른 기록에는 15세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 당하여 농장에 장사를 하고 집안이 솔가하여 여기서 3년 시묘를 했다고 있다. "매월당김시습연구"라는 단행본을 발간한 정주동교수는 이농장이 있는 곳을 강릉이라고 단정하여 매월당이 이 때에 시묘하느라 3년을 강릉에서 지냈다고 있으나 문집에는 농장으로 기록되어 있지 강릉이라는 말은 전무하다. 더욱이 강릉김씨 청간공파 세보에 의하면 매월당의 부모의 생몰연대의 기록이 없고 다만 모친이 선사(仙 )장씨라고만 있고 묘의 소재지도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여 그가 시묘하기 위하여 강릉에서 3년을 지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이 것은 관향이 강릉이니 강릉에다 장사를 지냈거니 하는 추측이지 문헌적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매월당이 전국을 주유하여 많은 행각 시문을 남겼으나 그 중에서 강원도의 시문이 가장 많다는 이야기를 이미 했거니와 강원도가 그의 관향인 탓인지 또는 성정이 산수를 즐겨 강원도의 경관이 그에 마음에 들어서였던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강원도에 걸음도 여러번 하지마는 한 때는 강원도에서 운수행각을 한 것이 아니고 여기서 영주했던 때도 있다.
선조의 명에 의하여 율곡(栗谷)이 지은 "김시습전"에 의하면 매월당은 강릉 양양등지에서 즐겨 놀았고 설악 한계 청평산들에서 오래 머물었다고 있고 남효온(南孝溫)의 문집인 "추강선생집"(秋江先生集)에는 "계묘년 3월 10일에 김시습이 책을 싣고 관동지방으로 간다기에 이를 전송을 했다. 매월당이 두루 관동지방을 섭렵하여 그 곳에 농사지을 생활의 터전을 만들어 살고 다시는 이 쪽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이기에 술을 가지고 서로 나누며 천리나 떨어지니 이제 다시 만날 기약이 없구나"라는 글이 있다. 이에서 보면 매월당은 강원도를 산수가 좋아 유력의 땅으로만 여긴 것이 아니고 정착 할 곳으로도 생각했던 것이니 자연 강원도가 배경이된 시문이 많을 수 밖에 없고 강원도 가운데서도 춘천과 강릉에 유독 시문이 많다.


3. 매월당의 춘천 연고

매월당이 춘천에 얼마 동안 머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춘천에 여러 편의 시문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렇고 청평사에 들려서는 오래도록 머물었던 탓으로 '수춘지(壽春誌)' 청평사조에 "매월당이 청평사에서 은거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얼마나 그가 머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며칠 두류했다고 있지않고 은거했다고 있으니 지나다 잠깐 머문 것이 아니고 상당히 장기간 머물었던 것으로 보여 춘천은 매월당과 특별한 연고가 있는 곳이다.
매월당의 관동유력 가운데 그의 나이 25세에서 26세 사이에 이 곳에서 유력한 행각기인 "유관등록"에는 춘천이 빠져 있다. 그가 24세 때에 관서유력을 마치고 서울에 왔다가 다시 관동유력의 길을 떠나는데 그 행정을 살펴 보면 경기도 포천 영평을 거쳐 강원도 김화로 해서 내금강을 보고 철원을 거쳐 다시 경기도로 갔다가 여기서 원주를 거쳐 오대산을 지나 강릉에 이르는 행정으로 되어 있다. 행정이 이러하다 보니 "유관등록"의 행정에는 춘천을 거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관동일록"에서는 춘천이 처음의 기착지로 되어 있다.
수춘지에 매월당이 춘천 청평산에 은거 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말을 앞에서 했거니와 수춘지 외에도 이정향(李廷馨)의 청평사 시 가운데 "옛적 청한자(淸寒子)를 생각한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청한자는 매월당 동봉(東峰)과 함께 그가 쓰던 호이다. 따라서 "옛적 청한자를 생각한다"는 것은 여기에 매월당이 은거하고 있었다는 증좌이다. 매월당이 청평사에 얼마 동안 살았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수 없으나 앞서 언급 한 글의 내용으로 보아 지나다 잠깐 들른 것이 아니라 춘천에 오래 거주 했던 것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연고로 해서 춘천의 경관을 주제나 소재로 한 글이 단위지방을 단원으로 보았을 때는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의 하나가 춘천이다.
매월당집 권14 "노병"(老病)이라는 제목의 시에 "늙어 병든 뒤에 3년을 예맥에서 살았네"라고 한 구절이 있다. 그가 춘천에 많은 시문을 남겼고 "춘천 10경"이라는 특이한 시를 남겼다는 것은 춘천에 관심이 컸었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앞의 시에서 예맥에 3년을 있었다고 하였으나 여기서 예는 선사시대의 강릉지방의 통칭이고 맥은 이 시대의 춘천의 지칭이다. 따라서 예맥에서 3년을 있었다는 것은 강원도에서 3년을 지냈다는 이야기일 뿐 구체적으로 강릉과 춘천에서의 두류기간을 이 시 만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가 "관동일록"에서 강원도지방 행각을 시작한 것이 그의 나이 49세때 이다. 그가 59세에 세상을 떴으니 그의 생애로 보아 49세는 만년에 속한다.
매월당이 49세 3월에 추강과 헤어져서 먼저 들린 곳이 춘천이다. '관동일록'에 "맥국에 첫눈이 나린다"라는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면 겨울 까지 춘천에 유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관동일록' 3년간에 얼마를 춘천에 머물러 있었던 것인지 정확하게 그 기간을 알 수는 없으나 최소한 3월에 와서 눈나릴 때까지는 춘천에 있었다. 이 것은 최소한의 경우이고 '관동일록'중에 동지라는 시가 있다. 이 시에 의하면 그의 나이 50세 되던 해에 동지는 강릉에서 지낸 것으로 되어 있으니 49세 3월에 춘천에 와서 다음 해 동짓달에는 강릉에 가 있었다. 이동안의 춘천 두류기간을 정확하게는 산출 할 수는 없으나 그는 춘천서 며칠을 두류 한 것이 아니고 상당히 장기간 머물렀으니 그러하였기에 이 곳에 많은 시문을 남길 수 있었다.
'유관동록'에는 춘천지방의 시문이 없으니 문제 밖의 일이고 그의 춘천지방의 시문은 '관동일록'외에 '기행'의 단원 속에 또 산견 된다. '관동일록'은 하나의 독립된 단원으로 여기에 실려 있는 춘천관계 시문은 '관동일록' 행각 때에 쓰여진 것이고 그의 문집 '기행'의 단원에 들어 있는 춘천관계 시문은 '관동일록' 행각 때에 쓰여진 것이 아니니 이 것으로 미루어 보면 매월당은 최소 춘천에 두 번 이상 다녀갔던 것을 알 수 있다. 한번의 기행에서 지은 시문이면 제목이 중첩 될 일이 없을 것이고 설사 그럴 필요가 있었을 때는 '又'로 표기하는 것이 한시의 정석인데 "기행"과 "관동일록"에는 소양강 청평산 우두등 시제가 중복 되어 있는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관동일록'과 '기행'은 단원이 달라 매월당이 최소한 두 번 이상 춘천에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관동일록은 그의 나이 49세 때로 기록 되어 있으니 이 것은 다시 용훼할 필요가 없거니와 '기행'에 들어 있는 춘천 관계 시문은 언제의 행각기겠는가가 궁금하다.
매월당이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 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부하던 책을 불사르고 하산 한 것이 세조 원년 을해년이니 그의 나이 21세 때이고 관서지방의 운수행각을 한 것이 24세 때이니 하산하여 관서 행각에 오를 때 까지 3,4년의 공백기가 있고 이 시기에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확연치 않다. 혹 이 기간 동안에 설악산에 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혹 서울 주변배회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21세에서 30세 까지를 방랑기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다.
24세이후는 그런대로 행정이 잡히는데 21세에서 24세 관서행각을 시작 할 때 까지의 행각이 묘연하여 막연하게 방랑기에 넣기도 하고 또는 서울 주변 배회기라 막연 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나 윤연춘(尹年春)의 매월당전기에 의하면 하산 하던 해인 21세 때에 속세를 피하기 위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승려의 이름인 법호를 설잠(雪岑)이라 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가 21세 때에 승려가 되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기록이 있으나 어디서 불문에 입문했다는 것은 정병욱교수의 연보나 정주도교수의 "김시습연구"에도 불교에 입문한 사찰명이나 은사의 이름은 없다.
본래 승려생활의 수도 과정에 운수행각이 있어 오늘은 이 절 내일은 저 암자 하는 식으로 고정된 거처가 없을 수 있으나 매월당과 가장 깊은 연고가 있었던 거처는 설악산 오세암과 홍산 무량사, 그가 금오신화를 쓴 금오산실. 은성동폭천정사 등이고 강릉 양양등지에서 기거 할 때는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아니하여 알 수 없다. 이 몇 개의 거처 가운데서 21세에서 24세까지의 거처로 오세암 이외의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다만 오세암이 이 시기의 매월당과 연고가 있다고 보면 서울에서 설악산 오세암으로 가는 노정이 반드시 춘천을 통과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면 매월당이 '관동일록'외의 춘천행각이 바로 이 때가 아니였겠는가 하는데 생각이 미치고 이렇게 되면 "기행"에 들어 있는 춘천관계의 시문도 바로 이 시기에 지어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매월당집 부록에 "단종이 손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변소에 떨어져 거짓 실성하듯 하여 인제 설악산에 들어갔다"는 구절이 있다. 이것으로 보면 매월당이 승려가 된 것도 설악산에서이고 이 외에도 매월당과 설악산은 여러 가지 연고가 있다.
노산(鷺山) 이은상의 "설악행각"에 "일찍 단종대왕이 손위하시자 그 충절을 참기 어려워…… 설악 한계 청평 등 산에 다주 하였던 것으로 특히 이 관음암에 구류하였던지라 그의 5세신동 이라는 별호로써 암명을 개칭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있고 또 학암당(鶴岩堂)의 오세암 경각 중건기에 "5세라는 암자의 이름은 여기에 있던 5세 신동이 견성(見性)한 곳이라 하여 오세암이라 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제산조사가 쓴 기록을 상고 해 보니 과연 오세조사가 있으니 신빙할 만도 하고 혹 매월당선생이 이 곳에 거주하고 있어 그를 오세신동이라 칭하였기에 이로 인하여 오세라는 암자의 이름이 생겼다 하나 이두 설이 다 문헌이 없어 어느 것이 진실인지 가늠 할 수 없다"라고 있어 문헌적 근거는 없으나 암자의 기문에 이렇게 기록할 정도라면 상당 한 연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김금원(金錦園)은 "설악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것은 두 김선생이라 했고 두 김선생 중 한 사람은 설악에 오래 거주 했던 김삼연이고 다른 한사람은 매월당이다"라고 했다.
더욱이 오세암에는 매월당의 영정이 있었다. 인제군지에는 보물급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그 등위는 고사하고 오세암에 매월당의 영정이 있었다는 것은 오세암과 매월당의 연고를 더욱 확실하게 하여 주는 증표의 하나 이다. 승려라하여 아무나 영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그 사찰의 조실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승려가 아니면 영이 없고 이 것은 근대 우리나라의 모든 사찰의 영이 다 그러한 위상의 승려들의 영으로 되어 있다. 영정각 없는 사찰이 얼마나 많으며 천년 세월 속에서 수백 수천의 승려가 그 사찰에서 기거 했것만 영각 안에 봉안 되어 있는 영은 두세점이 고작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매월당의 영정이 오세암에 봉안 되어 있었다는 것은 예사 연고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을 노산이 일제시대 설악행각을 할 때 오세암에서 배관 했다고 그의 '설악행각'에 기록 되어 있으니 이 것은 실존이지 전설이 아니다. 이러고 보면 앞서의 학암당의 오세암 경각 중건기에 있는 오세라는 사명이 오세에 견성한 아이의 전설로 해서 생긴 것이 아니고 매월당의 오세신동설이 더 비중이 크다. 더욱이 이 절이 오래도록 관음암으로 불리우다가 매월당 이후인 인조 때에 오세암이라 했으니 매월당 연고의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매월당이 그의 문집 부록에 있는 것 같이 설악산에 들어간 것이 확실하고 그가 설악으로 처음 갈때의 행정이 춘천을 경유했을 것이 바른 길이다. '관등일록' 외의 기행에 있는 춘천관계 시문은 이 때의 것으로 생각 할 수 있고 남의 이야기를 듣고 지었다는 '춘천 10경'시도 이러한 배양토가 있었던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4. 경관시(景觀詩)8경과 10경

'춘천 10경'시는 춘천의 경관을 노래한 경관시 이다. 한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가 경관과 정회이다. 한시를 풍월(風月)이라고 까지 말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바람과 달' 곧 자연 경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정회는 감정의 서회이다. 한시 뿐만 아니라 모든 시의 바탕은 다 자연경관과 정회의 운률적 서술이라고 한다면 한시도 이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한시를 풍월이라고 까지 말 하는 것은 자연경관이 소재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데서 연유 한 탓으로 한시하면 의례껏 자연경관이 먼저 떠 오를 정도로 경관을 노래 한 시가 많다.
한시의 기본 구성은 기승전결(起承轉結)로 처리하고 이 것은 5언이나 또는 7언, 혹은 절구나 율시 어느 장르에도 구애 되지 않는 공식이다. 다만 절구일 경우에는 4행이니 기승전결이 한행식이 되고 율시일 경우에는 두행 즉 한 연이 기승전결에 교관이 되어 진다. 기승전결 가운데 전은 바꾼다는 의미의 말로 이것은 한시에서는 꼭 지켜야 할 규칙이다. 한시에 있어 첫줄인 기구가 정으로 시작 되었으면 다음은 그 것을 이으라는 뜻에서 승이라 했으니 둘째 줄도 정회적 내용이 되어야 하고, 세 번째의 전은 바꾸라는 뜻이니 기승이 정회였다면 전에서는 경관인 경으로 채워야 한다. 시를 정회에서 시작 했으면 전인 셋째줄전에서는 반드시 경관을 노래 해야 한시 규범에 맞는 한시가 되어진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한시는 경관과 정회의 교직으로 경관은 정회와 함께 한시의 2대 골격이고 이런 한시가 풍월적 성격이 대부분이라는 것은 거의 한시작법상의 숙명성이라 할 것이다.
한시의 소재로서의 경관이 이렇게 한시에서 비중이 크다 보니 경관이 뛰어난 곳에 한시가 많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말을 바꾸면 한시 없는 경관은 있을 수 없고 한시의 양이 경관의 등위와 비례 한다는 것이다. 또 경관을 내용으로 한 한시는 풍류와도 짝 했다. 풍류는 물질과 명예 까지를 초극하고 물외 세계에서 호유하는 것인데 경관이 뛰어난 곳에서 그 경관에 취하여 있으면서 동시에 물질적 생각에 골몰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본 모습이기에 경관에 관한 시는 늘 물외를 소요하게 마련이고 이 물외를 소요하는 상태를 풍류라 한다. 그러기에 경관을 배경으로 한 시는 풍류시요 풍월이 대부분이고 8경시나 10경시도 이 범주에 둔다는 것이 상식 이다.
경관은 풍류와 짝이 되어 있는 것이기에 경관 좋은 곳에는 반드시 그 경관에 알맞는 누정이 있어 그 곳의 경색을 배가 시키면서 풍류를 연출 했던 것이 지난 날의 우리나라의 선비였다. 이 풍류가 선비에 전유물이다 보니 경관 좋은 곳에는 반드시 누정이 있고 이 누정에는 그들의 풍류의 표상인 시판이 있게 마련이며 8경시나∼10경시도 이들과 연원을 같이 한다 할 것이다.
우리나라 에는 경관 좋은 곳에는 그 곳 경관을 다시 8경이나 10경으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어 크게는 수개의 시군을 한 단원으로 한 관동 8경과 같은 것이 있고 작게는 활래(活來)10경과 같이 정자 하나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8경도 있다. 그런데 이 8경이나 10경이 공인된 규범이나 기준이 있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사람의 입에 오르 내리며 오랜 세월 동안 흘러 오는 사이에 이룩 되어지는 수가 많다. 물론 이에서 예외 일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활래10경과 같은 것은 활래정의 주인이 만들어 대대로 후전 한 것인데 이와 같은 것이 간혹 사유정자에는 더러 있을 수 있으나 공유의 것일 경우에는 구비문학에 작자나 제작의 연대를 찾을 수 없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이를 테면 관동8경에 지정의 연대나 지정의 동인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을리 없듯이 강원도 각 고을 마다에 있는 8경은 다 이와 같은 상황 이다.
한 고을이나 한 승지의 경관을 하필 왜 8경이나 10경으로 정하였느냐 하는 것을 살필 필요가 있고 이 것은 또 본논문이 매월당의 춘천10경을 살피게 되어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경관의 표현에는 대개 8경과 10경의 두가지가 있는 것 같고 이외의 것은 본 일이 없으나 이 두가지 가운데도 8경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 8경이나 10경의 경관은 시로서는 5언이나 7언의 절구나 율시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고 때로 배율(徘律)로 된 것도 있고 매월당의 '춘천10경'시와 같이 5언 이기는 한데 정격에서 벗어난 변격의 시도 있으나 경관의 명칭은 한자 4자나 3자로 표상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8경이나 10경은 크게는 한 나라를 단원으로 한 것에서부터 한 고을은 물론 작게는 앞서 말한 정자 하나를 단원으로 이루어 지고 있는것도 있다. 국가를 단원으로 한 것으로는 육당최남선의 전집에 있는 '조선10경'이 그 것이고 몇 개의 시군을 합쳐서 한 단원으로 한 것에는 관동팔경이 있고 더 작게는 행정구역 마다 8경이 있고 작은범위의 것으로는 정자하나에도 8경이 있다.
이 8경이나 10경의 연유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중국이 그 연원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명종(1170-1197)때에 명종의 명에 의하여 이광필(李光弼)이 소상팔경을 그렸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는데 이 것이 우리나라에서의 8경의 효시라고 한다면 중국은 소상8경도가 송나라 송적에 의하여 11세기경에 이미 그려졌다니 고려보다 한세기 쯤 앞선 셈이다.
여기서 소상8경도가 그려졌다는 것은 병풍과 관련이 있다. 한폭에 한경관을 그려 팔폭병풍으로 만들면 보관이나 완상에 가장 적당하기에 팔경으로 그렸을 것이고 이 것이 연원이 되어 8경은 경관 표현의 기준으로 정착이 되었을 것이다. 10경도 8경의 형성과정과 크게 차이가 없어 이 것도 10폭의 병풍과 관련이 있다. 풍경을 그림이나 글로 보관하려면 병풍이 가장 좋은 기물이고 병풍을 짝수로 만들어야지 홀수로는 만들 수 없다 보니 8폭병풍이 거의 기준이고 대병일 경우가 10폭 병풍이다. 우리나라에서 글씨 병풍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글이 주자(朱子)의 무이구곡 시 이다. 무이구곡은 본시 9수 외에 앞에 서시 한수가 있어 전체로는 10수의 시로 되어 있어 10폭 병풍만들기에 그 분량이 가장 적당 한데 작자인 주자가 유교사회에서는 거이 종사의 대접을 받았기에 글씨로 된 10폭병풍으로는 무이 구곡병이 가장 많은 것이다. 자연 경관에서는 8경이 정형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여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경관의 수자 표시의 대종이 8경이고 10경이라는 것은 변형으로 보인다. '중문대사전'의 '팔경'조에 보면 원명(元明)때에 연경8경이 있었는데 뒤에 그 경을 더 넣어 연경 10경을 만들었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8경이 정형이고 10경은 첨가 된 변형인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경관에 관한 시는 8경이나 10경이 짓는 사람의 감회에 따라 시형을 마음대로 선택 하고 있으나 경관의 명칭만은 중국이나 우리나라가 다 한자 4자로 말을 만드는 경향이 짙다. 이 한자 4자 가운데 예외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앞의 두자는 경관이 이루어진 장소를 말 하고 뒤의 두자는 그곳의 경색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 통례로 이를 테면 육당의 조선10경에 "금강추색"(金剛秋色) "경포월화"(鏡浦月華)가 그 것이다. 금강은 경관이 이루어진 지명이고 추색은 단풍을 말 한 것으로 경색을 서술한 것이며 경포월화도 앞의 두자 경포는 지명이고 뒤의 두자 월화는 경포의 달빛으로 경관의 서술이다. 이러한 서술 방법은 우리나라나 중국이 꼭 같아서 경관 서술의 공식처럼 되어 있으나 때로 예외로 뒤의 2자가 서술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고 제영(題永)일 경우에는 강릉팔영과 같이 한송정, 경포대, 녹균류 등 경색의 당처 만을 기록 하는 방법도 보인다.


5. 강원도 각 고을의 8경

강원도는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금강산 설악산과 같은 한국의 명산이 다 강원도에 위치하고 있는데다 특히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誌)에서 강원도 영동지방의 경관을 찬양하고 있다.
강원도는 산수의 경관이 이러하기에 찾아든 시인 묵객이 많아 이 곳 경관에는 무수한 시문들이 남아 전하고 그 표상적 존재가 관동8경이다. 관동8경은 강원도의 동해안에 있는 경관을 현. 군. 도호. 대도호의 조선시대 행정 단위를 바탕으로 한 고을에서 그 고을의 승경 한 곳씩을 지목하여 놓은 것이 관동8경으로 강원도 경관의 표상이기도 하다. 앞서 이들 8경은 준칙이나 규정이 있어 그에 따라 선정 된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 되던 속설이기 때문에 혹 이설이 더러 있고 그 예의 하나가 관동8경이다.
관동8경은 강원도 영동의 각 시군에서 한 곳씩 한정한 경관이나 강원도 영동은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으로는 8군이 아니고 9군이다. 이 9군에는 현에서 대도호까지 들어 있으나 한 고을에서 한 곳씩을 선정하면 9경이 된다. 최남은 평해의 월송정이고 최복은 흡곡의 시중대 이다. 월송정에서 시중대 까지의 각 고을 마다 한 곳의 경관을 쳐가면 9경이 되기에 기록에 따라 혹 최남의 월송정이 빠지기도 하고 최복의 시중대가 빠지기도 하며 8경을 만들고 있고 또 기록에 따라 상치 한 곳도 있다.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양양의 경관으로 청초호를 기록하고 있으나 임영지나 강원도지에는 양양은 낙산사를 꼽고 있어 저오한데가 있고, 8경으로 맞추다 보니 택리지에는 흡곡 시중대가 들어 있고 평해월송정이 빠져 있으며 임영지나 강원도지에는 평해 월송정이 들어 있는 대신 흡곡 시중대는 빠져 있다. 앞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8경의 선정이라는 것이 법령에 의하여 이루어 진 것도 아니고 어떤 준칙에 따라 된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속설에 의한 구비의 산물이기에 저오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어느 설이 진이고 어느설이 가라는 규범적 단안을 할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강원도내의 각 시군에는 시군 단위의 팔경 즉 춘천 팔경, 영월팔경, 양구팔경 등 식으로 시군 단위의 팔경이 없는 곳이 없고 한 고을 가운데서도 승경이라는 곳에는 반드시 팔경이 있다. 춘천의 소양팔경 강릉의 경포팔경, 양양의 낙산팔경등이 그것인데 이 승경단위의 팔경 말고도 강원도 내에는 면 단위 심지어는 이 단위 까지 팔경이 있고 곳에 따라서는 구팔경 신팔경하여 한 고을에도 몇 개의 팔경이 있다. 강원도에 이렇게 팔경이 많은 것은 강원도가 산수가 빼어 나 승경이 많은데도 그 원인은 있겠고 팔경의 지정에 규제나 규범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속설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고 도내의 모든 팔경이 한문으로 되어졌다는 것은 이것이 일반 글공부가 없는 서민생활에서 연유한 것이아니고 선비들의 풍류생활과 관계 되었던 것이다. 앞서 한시의 작법에서의 경의 비중에 관한 말을 하였고 이 것과 풍류와의 관계에 대하여서도 언급하였거니와 자연경관은 글하는 선비들에게 있어서는 시문과 직결 되어 있는 것이고 이 것은 곧 그들 생활에서는 풍류와 연관이 지어지고 있다. 요동 천리벌이 경제적 효율성은 클지 몰라도 풍류를 연상 할 경관이 아닌데 반하여 산 많고 물 맑은 강원도의 자연경관은 경제적 효율성은 작을지 몰라도 풍류로운 정회를 충족 시키기에는 족했기에 강원도에는 도처에 팔경이나 십경의 경관이 있다.


6. 춘천팔경과 매월당의 춘천십경

1) 춘천팔경
매월당의 춘천십경을 살피기 전에 이에 앞서 통칭되고 있는 춘천팔경을 먼저 살피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춘천의 읍지의 하나인 수춘지에는 춘천의 여러 가지의 경관을 기록 하고 있다. 여기에 춘천의 팔승을 소양사미(昭陽四美), 조양육승(朝陽六勝), 봉태사의(鳳臺四宜), 고산오기(孤山五奇), 경운사령(慶雲四靈), 국사일시(國士一時), 문암삼절(門岩三絶), 곡운구곡(谷雲九曲)이 그 것인데 이 팔경은 경관마다 다시 숫자로 표시 한 수 대로의 세부경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속설이기에 구비로 전승하던 것으로 제정의 연대나 제정한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소양사미는 소양강을 중심한 물관 산의 네가지 경관으로 춘천경관의 개황을 말함이고 조양육승은 우두산 조양루에서 본 경관이다. 조양루는 본시 문소각의 문루였기에 위봉문과 함께 창건 되었다가 1908년에 현재의 우두산으로 옮겨 온 누정으로 이 조양육승은 현재의 우두산에서 바라 본 육승이니 이 것으로 미루어 보면 수춘지에 기재 되어 있는 이 팔경은 20세기 들어서 제정 된 것으로 보인다. 봉대사의는 이수와 삼산의 경관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봉의산에서의 조망 경관이고 고산오기는 현재 중도에 있는 고산의 경관이다. 경운사령은 지금의 청평산을 경운산이라 했고 여기서는 불교유지의 경관을 말하고 있고, 국사일시는 현재의 국사봉 태극단을 이르고 있다. 문암삼절은 지금의 삼악산 일대의 상원사 등선 폭포등의 경관이고 곡운구곡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화천에 있는 곡운계곡의 경관을 이르고 있다.
소양팔경으로는 봉의귀운(鳳儀歸雲), 호암송풍(虎岩松風), 월곡조하(月谷朝霞), 우두모연(牛頭暮煙), 고산낙조(孤山落照), 매강어적(梅江漁笛), 화악청람(華岳淸嵐), 노주귀범(鷺洲歸帆)으로 되어 있고 수춘지에 실려 있는 또 다른 춘천의 경관을 말 한 소양팔경은 봉강조양(鳳岡朝陽), 노주낙조(鷺洲落照), 우두황운(牛頭黃雲), 봉태명월(鳳坮明月), 옥포이화(玉浦梨花), 금병풍엽(錦倂楓葉), 이수어적(二水漁笛), 삼산모종(三山暮鐘),으로 되어 있다.
여기 기록한 춘천에 전래 되어 온 두 개의 팔경은 다르기는 하나 그 골격이 소양강 봉의산 우두벌등 춘천의 산수가 배경이 되어 있다는 공통성도 있고 한자의 4자성어의 경우에는 앞의 두자는 경관의 당처이고 뒤의 두자는 앞의 당처의 서경이다. 이 것은 팔경의 연원이라는 소상팔경이 이런식으로 되어 있는 탓에서 온것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의 모든 팔경의 경관표현이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 상례 이다. 이 한자 4자로 된 춘천 팔경에는 경관에 대한 서술은 없고 다만 경관처 만의 팔경이 또 있다. 이것은 소양정 우두정 고산 청평산 삼악산 등선폭 구곡폭 곡운이 그 것인데 경관에 관한 서술은 없으나 대체로 앞의 두 개의 경우와 상사 한데가 있고 서로 맞지 아니한것도 있기는하나 이상이 춘천을 표상하는 경관의 대충 이다.
산하도 변한다고는 하지만 그 골격이야 세월 따라 달라질 수 없을 것이니 매월당이 춘천서 본 춘천의 경관도 대충 이러한 것이었기에 그의 '관동일록'이나 '기행'의 춘천관계 시문의 소재도 대충 이 팔경의 테두리에서 멀리 벗어나지 아니 한다. 그러니 그가 춘천 십경은 직접 보지않고 지었다고 하고 '관동일록'과 '춘천십경'의 연대에 대하여는 식별하기 어려우나 매월당집 부록에 의하면 단종 손위 후 바로 설안산으로 갔다고 있고 앞에서 이 때 그는 춘천을 거쳤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춘천십경을 지었을 때 그는 이미 춘천의 경관을 본 뒤의 일로 여겨진다.

2) 매월당의 춘천십경
앞서 춘천팔경에 대한 서술을 하였으나 춘천십경은 매월당의 이 글 외에는 아직은 다시 없어 그 존재가 기이한데 이 글이 더 기이한 것은 매월당이 춘천서 체험한 십경이 아니고 춘천서 온 나그네가 하는 말을 듣고 지은 글 이다.
이 춘천십경은 매월당집 권 6 시에 있으며 그 시제가 "춘천10경"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춘천서 온 나그네가 그 고을의 10경을 말하기에 시를 지어 주었다"라고 있다. 대개의 경우 경관에 관한 시는 몸소 체험 한 것을 쓰는 것이 통례인데 매월당의 이 춘천 10경시는 제작의 동인부터 상궤를 벗어나고 있다. 이 시는 취유춘성(醉遊春珹), 반도소양(返棹昭陽), 채약선동(采藥仙洞), 심승화악(尋僧花岳), 조어신연(釣魚新淵), 환도고산(喚渡孤山), 송객강정(送客江亭), 음과석교(吟過石橋), 말마송원( 馬松院), 벌토추림(伐兎楸林)의 심경으로 되어 있어 경관의 성어법이 특이 하다. 한문은 글자 자체가 조어 능력이 있는 글자이기에 주어와 서술어의 위치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것은 없겠으나 육당의 조선 10경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8경시가 4자 성어로 되어 있고 이 경우에는 주어 2자를 앞에 놓고 서술어 2자를 뒤에 놓는 것이 통례이다. 이를테면, 조선10경에서 '금강추색'이나 '경포월화' 라던가 춘천의 '이수어적'이나 '삼산모종'이 그것이다 그런데 매월당의 춘천10경은 그 문구의 구성이 전도 되어 서술어가 앞에 놓이고 주어가 뒤에 와 있다. 전도 되었다하여 뜻이야 다를 바 없겠으나 말이 주는 구상적 뉘앙스는 같지 않다. 이를테면 매월당의 춘천 10경의 '송객강정' "강가의 정자에서 나그네를 보낸다"나 "조어신연" "신연강에서 낚시질 하다"가 바로 그 것이다 우리말의 결에 맞도록 해석을 해 놓으니 아무런 저오함이 느껴지지 않으나 통상 '송객강정'은 '강정송객'이고 '조어신연'은 '신연조어'로 되어 있어야 할 터인데 소제의 설정에서 도치 법을 쓰고 있는 기이 함이 있다.
이 글을 전체 5언 십수로 되어 있는데 그 시형도 변격이다. 5언이던 7언이던 간에 기본 시형은 4행의 절구 8행의 율시를 정격이라 하고 그 이상은 변격인데 22행으로 되어 있다. 한 주제에서 22행으로 지었으니 전체는 220행의 장시로 강원도의 경관시로서는 이보다 장시는 있을 것 같지 않다. 강원도 각 고을의 8경시나 8경을 배경으로 한 8영에서 220행의 장시는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접한 일이 없다. 경포대나 소양정에 시문이 많지만 거의 절구나 율시의 형태를 취하였지 매월당의 춘천10경과 같은 장시는 없어 이런 점에서도 매월당의 춘천10경은 특이한 작품 이기에 여기 10경을 하나 하나 그 개요를 살피기로 한다.

(1) 취유춘성(醉遊春城)
각 경관 마다 22행의 장시 인데 제대로 압운(押韻)된 그의 시재가 가늠이 되는 시이다. 이 첫 시는 서시로 춘천의 어느 특정 한 경관을 노래한 것이 아니고 춘천서 봄을 지내는 정희를 읊은 것이다. 따라서 이 시 가운데는 춘천의 특정지역을 감지 하게 하는 글귀는 한군데도 없고 제목의 춘성도 고유명사로 본다면 춘천이 되겠지만 봄산이라는 보통명사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되어 있다. 맨 첫귀 "춘성에 모든 꽃이 활짝 피니 봄철 흥이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되어 있어 보기에 따라서는 춘천의 봄 경치가 좋다는 서경이지 춘천10경 가운데 어느 곳의 경관의 표현은 아니다. 물론 춘천에는 춘성이라는 경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시는 매월당의 춘천10경의 서시가 분명 하다.
22행의 시 속에 춘천의 경관지의 지명이 나오는 곳은 한 곳도 없고 이 시의 끝 부분 "강바람은 실처럼 가냘프고 강물은 이끼 처럼 푸르네. 경물을 구경하니 흥이 많지만 즐거움이 다하면 슬픔이 따르네" 시 전체에서 춘천으로 표상 되어 있는 곳은 맨 첫줄의 '춘성'이라는 단 한 마디 뿐이고 그 밖의 모든 시사는 어디에서나 있는 경황이며 서회이다. 다만 끝에 강바람과 강물 빛에 대한 언급은 춘천이 예나 지금이나 물의 고장이라는 암시성을 암유하고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춘천은 지금 댐으로 해서 물의 고장이라고 하지만 댐이 없던 시대에도 춘천은 금강산 물과 설악산 물이 합수하여 북한강을 이루고 있는 물의 고장이었다. 그러나 이 것도 개괄적인 이야기일 뿐, 이 시의 주제는 아니고 다만 이시는 춘천의 봄의 정취를 노래 하고 있을 뿐이다. 대개 8경시나 10경시에는 반드시 그 경관의 당처가 있게 마련인데 '취유춘성'은 당처가 없는 춘천에의 정회이다.

(2) 반도소양(返棹昭陽)
우선 주제가 소양강으로 되어있으니 당연히 춘천10경에 들어야 할 춘천의 경관이다. 여기 소양 앞에 관형 되어 있는 반도는 뱃길을 말하는 것으로 이 시 가운데는 소양강의 뱃소리를 읊고 있어 배와 관계 되는 낚시. 뱃노래 등이 소재로 활용이 되어 있는 시이다.
또 여기에는 분명 한 춘천의 지명이 등장 한다. "새벽을 헤치며 강을 거슬러 모진예를 행하여 떠나가니 물결 치는 소리는 그치지 않고 가는 배도 그 역시 거침이 없네"라고 한 구절에서 '모진예'(母津汭)는 춘천서 화천으로 가는 중간지점의 지명이며 여기가 바로 38경계선이다. 그러니까 '모진예'는 내금강물이 지금의 평화의 댐을 거쳐 화천을 지나 춘천에 이르러 소양강과 합수하는 일명 자양강가의 조그만한 취락이고 춘천서 가려면 강물을 거슬러 가야하는데 이 시에서도 '새벽을 헤치며 강을 거술러 모진예를 행하여 떠나 가나니' 했으니 지리적으로도 맞아 떨어진다 춘천서 모진예로 가자면 자양강을 거슬러 올라 가야 하는데 이 시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
또 이 시에 "청평산을 우러러 바라다보니 여러 봉들 멀리 떨어져 있네"라는 구절이 있다. 청평산은 춘천8경에도 나오는 산으로 춘천경관의 원경을 이루고 있는 산이다. 산과 물은 경관의 대종으로 서로 짝이 되어 있다. 소양강 물의 경관에 배를 곁드려 풍류를 살렸고 여기에 춘천의 명산인 청평산을 원경으로 끌어들인 춘천 산수를 서경 한 시 이다.

(3) 채약선동(采藥仙洞)
이 시의 주제는 선동 즉 신선의 고장에서 약을 캤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첫련이 "나는 약을 캐 가지고 돌아 오려고 배를 타고 청평내로 떠나 갔었네"라고 되어 있다. 매월당의 춘천10경 전체가 추상적 정회가 짙은 시로 여기 등장 하는 10경들은 경관처를 제시 한다는 정도이고 그 경관의 묘사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오히려 매월당 개인의 정회에 더 무거운 비중을 두고 여기에 중국의 고사를 한데 엮은 것이 이 연의 줄기이다.
글을 이러한 시각에서 쓰다 보니 경관에 관한 설명은 그 비중이 가볍고 더욱이 경관이 중첩하여 등장 하는 것은 청평산을 빼고는 다시 없다. 그런데 웬 일인지 청평산은 "반도소양"에도 등장 하고 '채약선동'에서 '청평내'가 다시 나타난다. 이 것은 이 춘천10경이 춘천서 온 나그네의 말을 듣고 지었다고 있으나 청평산 만은 그에게 있어 특별 한 관심이 가는 경관이었기에 중복하여 등장을 하고 있다. 앞서 매월당이 그의 시제로 보아 최소 두 번은 춘천 걸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가 춘천에 걸음을 했을 때에 지은 시에도 '청평산'과 '청평사'시가 그의 문집에 있는 것으로 보아 청평사에 연고가 많았던 것을 짐작 할 수 있고 이러한 연고가 춘천10경에 두 번씩이나 청평산을 인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매월당이 그의 10경에서 말 한 선동은 그 내용을 살펴 보면 신선이 산다는 상념상의 도원경과 같으나 그의 이시에서 보면 그 첫머리에 〈청평내〉즉 청평산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 '채약선동'시에 춘천의 지명으로는 청평 외에는 나오는 것이 없고 앞서 말 한 대로 그는 이 청평산과 청평사에 관심이 컸던 것을 짐작 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그에 있어서 청평산은 선경으로 여기기에 족하였을 것이다.
그의 문집에 의하면 그 13권에 '선동'이라는 율 한 수가 있다 기(起)승(承)양련이 서경이기는 하나 청평산과 관계되는 지명은 한 곳도 나오는데가 없고 다만 신선이 산다는 도원경의 고사를 그려 놓고 있다 '채약선동'에도 앞에 청평이라는 지명이 한번 나오고 다음은 거의가 신선의 고사를 서술하여 권 13 '선동'의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청평산은 승경으로 치고 있으나 조선 초만 하더라도 '선동'으로 이를 정도로 그 경관은 높이 평가 되었다. 더욱이 선동에서 약을 캤다고 하였으니 이 것은 신선들이 먹는다는 불사불로약을 상정하게 되면 이곳 선동과의 교관성을 짐작하게 된다.

(4) 심승화악(尋僧花岳)
승려가 화악을 찾아 그 경관과 정회를 노래 한 글로 춘천 화악산의 경관이다.
앞서의 각 시에서 뿐만 아니라 춘천10경 전체가 경관에 대한 상세한 서술이 극히 드문데 비하면 이 '심승화악'은 경관 위주로 쓰여진 글이다. 화악산은 강원도지 춘천 산천편에 있는 "고을 서쪽 9리에 있고 사람들이 백작산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바로 그 산으로 지금도 춘천에서는 이름 있는 산이다. 폭포 소나무 돌길 바람 등 화악산의 경치를 상세하게 서술 하고 끝에는 본인의 감회를 읊고 있다. 그가 속세를 등진 승려로서 화악산의 경관을 찾아 경관에 취하여 있는 동안에는 세속 일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으나 생각이 속사에 미치자 "속세에는 티끌 그물이 얽혀 있어 돌아 와 세월 속에 몸을 던지네"라고 노래 하고 있다. 이 구절은 매월당이 젊어 승려가 되었다가 47세에 머리를 기르고 아내를 얻어 환속을 하는데 마치 그 일을 노래한 대목과 연관을 주는 인상을 남긴다.
소양정의 소양8경 가운데 "화악청람"(華岳淸嵐)이라는 경승이 있듯이 춘천서는 멀리 보이는 산으로 소양8경과 매월당의 춘천10경 중에 있을 뿐 달리 경관으로는 나오는데가 드물다.

(5) 조어신연(釣魚新淵)
매월당집 권 13시에 '도신연'(濤新淵)이라는 주제의 시가 있고, 이 시는 일련의 춘천 관계 시와 같이 편찬 되어 있으며 춘천10경 가운데 '조어신연'이 있어 이 신연은 춘천의 경관 가운데 한곳에 틀림이 없다.
신연이 지금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연이 못이라는 뜻이니 물가인 것은 틀림이 없고 물이라 하면 작은 물웅덩이를 연상하기 쉬우나 그의 시에 신연을 건넌다는 제목으로 보아 신연이라는 강 기슭으로 짐직이 된다.
그런데 현존 하는 춘천 고읍지에는 신연이라는 못의 기록은 한곳도 없다. 산하에 관한 기록으로는 '수춘지'에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으나 여기도 보이지 않고 다만 '수춘지'에 "봉의산 밑 노주 윗 쪽을 신연(新延)강이라하여 북한강의 상류다"라는 기록이 있다. 한자로는 한자가 다르지만 음은 같다. 조어신연은 지금의 봉의산 아래 쪽의 신연강 즉 의암호에 옛 물줄을 이르는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니 '조어신연'은 신연강에서 낚시를 하는 경관 이다.
지난 날 강에서 삿갓 쓰고 도롱이 입고 한가하게 낚시 하는 것은 선망처럼 여겼기에 우리 선민의 그림 속에는 이러한 광경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많고 이 것은 하나의 경관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 '조어신연'의 첫 머리에 "전년에 푸른 도롱이 샀었고 금년에는 대를 엮은 삿갓을 샀다"로 시작 하여 낚시의 경관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세월과 풍류를 낚으려 하고 있다. 이 시에도 신연의 경관을 묘사 한 곳은 거의 없고 "낚시대를 드리우되 미끼는 없고 풀에 앉아 명상에 잠겨 버렸네" 고기 낚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풍류와 세월 낚는 은자의 심정을 노래 하고 있다.
춘천은 물의 고장이기에 '조어신연' 외에도 춘천팔경에 '매강어적'(梅江漁笛)이라는 것과 소양팔경에 '이수어적'(二水漁笛)이라는 낚시 풍경이 춘천의 경관으로 들어 있다.

(6) 환도고산(喚渡孤山)
주제는 고산에서 나가려고 배를 부른다고 되어 있으나 고산을 중심 한 서경시 이다.
고산은 춘천8경의 하나로 시문이 많은 섬으로 중도의 북쪽 끝의 바위로 된 산이며 지금도 그 이름이 고산이지만 매월당 당시에도 고산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 '환도고산'말고도 매월당집에는 '고산'이란 제목의 7언률시 한 수가 또 있다. 이 춘천10경은 매월당이 노중에서 나그네가 춘천경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지었다고 하나 문집 권13 시편에 있는 고산은 그가 춘천서 보고 지은 시이다. 이 시의 결련에는 "여기에서 세상의 모든 명리 다 버리고 낚시대로 물결에 잠긴 달이나 낚자"라고 되어 있어 세속을 멀리하고 자연에 귀의 하려는 심정을 노래 하고 있다. 이 '환도고산'은 서회로 보이는 구절은 드물고 거의가 고산의 서경으로 되어 있다. 거울 같이 맑은 물, 건너 가는 배, 깎아세운 듯한 석벽. 백빈주, 물결에 씻기운 모래, 석양 빛, 갈대 밭, 기러기, 낚시 하는 어부 등 이러한 말로 엮여 있는 것이 바로 이 '환도고산'으로 그의 '춘천10경'가운데서도 가장 서경적인 시 이다.

(7) 송객강정 (送客江亭)
제목 대로라면 강가의 정자에서 나그네를 보낸다고 되어 있으나 여기서 강정은 강가의 정자 즉 소양강변의 정자인 소양정으로 보인다.
옛 부터 춘천에 몇 개의 정자가 있었으나 오늘 남아 있는 것은 소양정이 춘천 정자의 표상이다. 춘천의 고읍지를 보아도 그 역사나 비중으로 보아 소양정이 춘천정자의 압권이기에 여기서는 강정이라 하고 있으나 이 정자는 소양정이 틀림이 없다. 지금은 소양정이 큰길 옆 언덕 위에 올라와 있으니 일제시대 까지도 큰길과 소양강 사이에 있어 문자 그대로 강가에 있는 강정의 영상에 맞는 정자이고 춘천8경 가운데 소양정이 들어 있고 문집에는 이 강정 말고도 '등소양정'이라는 시가 남아 전한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해 보면 이 강정은 소양정이다. 더욱이 송객강정의 첫 머리에 "강가에서 멀리로 사람 보내니 전별도 강변의 정자에서 하네"라고 있는 것 등은 이 강정이 소양정이 분명하다.
이 시에는 강정에서 보이는 경관은 언급이 없고 이별의 정회로 차 있는 글이다. 강정에서의 이별이기에 강정의 경관 보다는 이별의 정회가 앞서서 그러하였겠으나 이글은 강정의 경관을 10경에 넣은 것이 아니고 강정의 이별을 10경으로 잡았던 것이다. 앞서 한시의 작법에 전(轉)이란 규정이 있고 이 전은 정과 경으로 자연 스럽게 전을 시킨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시는 거의 이별의 정회로 일관 되어 있다.
(8) 음과석교(吟過石橋)
이 제목은 읊조리며 석교를 지나 간다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석교는 춘천의 경관의 하나로도 볼 수 있기도 하고 어느 특정 경관과는 관계가 없는 '돌다리'라고 볼 수도 있다. 보통명사로서의 돌다리인지 고유명사로서의 돌다리인지 알수가 없다.
춘천 산천에 관하여 상세한 기록을 하고 있는 수춘지에도 석교라는 산하나 경관은 없고 근년에 만들어진 춘주지(春洲誌)에도 석교라는 지명이나 경관은 없다. 그 밖의 강원도지 동국여지승람 등에도 춘천에 석교라는 곳이 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고 춘천의 고노들에게 물어 보아도 아는 사람을 발견 할 수 없다. 500년전의 일이라 세월 속에 묻혀 후인이 알 수 없게 될 수도 있고 혹 단순한 보통명사로 특정경관에 대한 지적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시는 시 전체를 통하여 자연경관이 그려져 있는 곳이 없어 더욱 실재 여부를 가늠하기 어려운데 다만 글 가운데 "괴로운 마음으로 시 읊으니 미산(眉山)도 주름 잡히고 높이 솟아 있는 견봉(肩峰)도 위태롭 구나"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미산은 미인을 칭하는 말로 쓰이나 견봉은 중문대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그런데 춘천에는 미산이나 견봉이라는 산이 없고 보면 이 것은 상징성을 부여 한 말로 밖에 볼 수 없다. 또 이 시의 맨 끝에 "쓸쓸한 정회를 누가 알리 늙고 쇠약한 생각에도 시상은 많다네"로 결구한 것으로 보아 이 시는 매월당의 감회의 서술 이다.

(9) 말마송원( 馬松院)
이 시는 경관일 수도 있지만 말을 먹이는 목축의 농업속에서 시작하여 전쟁에 나가는 서사적 시 이다. 말마라는 것은 말을 먹인다는 뜻이니 이 시의 서술 부분이고 송원이 이 시의 경관적 공간이다.
매월당이 노중의 나그네에게서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듣고 송원에서 말을 먹이는 것을 춘천의 10경으로 정하였는지는 지금 추량 할 길이 없으나 그의 10경시 속에는 경관에 관한 것과 정회에 관한 것으로 대별 되는데 이 '말마송원'은 후자에 속한다. 이 시의 끝에 "오랑캐의 전진이 날린다 하면 왕명으로 정벌을 하게 될 때 말 고삐 길게 부여잡고 내 너를 타고 나아 가리라"은 말을 기른다는 송원의 이야기 보다는 말의 효용을 노래 하고 있다.
이 말을 길렀다는 송원이 지금 춘천의 어디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혹 시에 직서 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추론의 여지가 있는 말이 있을 수 있는 경우가 있으나 이 송원은 전혀 그럴 만한 말이 발견 되지 않아 송원이 어디인지 짐작 할 수 없다. 다만 춘천에 송(松)자가 든 지명에 송암(松岩)리가 있고 그 건너편이 덕두원(德斗院)으로 조선시대 원이 있던 곳이다. 역이나 원에 역마가 있었던 제도를 상기하면 이 송원이 송암과 덕두원 인근이 아니 겠는가 하는 추상이 갈 뿐 이 것도 확실한 근거는 없고 춘주지등 춘천의 고읍지에 송원이라는 지명은 발견 되지 않는다.

(10) 벌토추림(伐兎楸林)
매월당의 춘천10경 가운데 앞쪽의 8경 까지는 그런대로 경관과 관계가 되어지는 시이나 이 뒤의 2경은 마치 경색중심의 8경에 10경을 채우기 위하여 덧붙여 놓은 듯한 인상을 주는 글이다.
마지막 이 글은 추림에서 토끼사양을 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추림도 고유명사로도 생각 할 수 있기도 하고 보통명사로도 생각 할 수 있는 애매한 말이다. 보통명사로는 가래나무 숲으로 해석이 되고 고유명사로는 추림이라는 고장이 고읍지 등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추(楸)자가 든 지명으로는 추곡(楸谷)이라는 곳이 있기는 하나 이 곳이 이시제의 추림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이 글 자체가 앞서의 말마송원과 같이 경관에 관한 서술은 없고 "북쪽 사막 전진 속에 무위를 떨치고 장성의 참호에도 달려 가면서……"로 추상적인 충군(忠君)사상을 고취하고 있다. 더욱이 토끼 사냥을 주제로 하고 있으면서 그 사냥에 대한 사연은 없고 독수리 사냥에서 충군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7. 결 어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알려진 경관은 8경 또는 10경으로 불리워지는 것이 많고 동양에서는 8경의 효시로 중국의 소상8경을 들고 있다.
이 8경이나 10경은 경관이기에 그림이나 시로 많이 그려졌었으므로 8폭이나 10폭의 병풍과도 연관이 되어 진다. 웬만한 가문에는 병풍 몇틀은 있는 것이 통상이고 이러다 보니 8경이나 10경의 그림이나 글을 접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

매월당의 글 가운데 '춘천10경'이라는 5언 장시가 있다. 매월당이 그의 생애 가운데 춘천에 왔던 적이 있고 현재 남겨진 그의 문집을 통해 보면 두 번의 내왕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의 문집 속에는 춘천의 경관을 노래한 글이 여러 수 남아 전한다.
그의 '춘천10경'은 춘천서 지은 것이 아니고 노중에서 춘천 사람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지은 것이 '춘천10경'이라고 기록 하고 있어 그의 문집에 있는 춘천 경관의 글들은 그가 춘천서 보고 겪은 것을 읊은 글이지만 '춘천10경'은 노중에서 들은 것을 시로 옮겼는데 이 시는 5언으로 되어 있고 한 경 마다 22행의 장시로 되어 있다. 이 시는 순수하게 서경만 한 것이 아니고 더러는 서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서회를 하고 있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벌토추림'이라던가 '말마송원'과 같은 것이 그것으로 서경은 제쳐두고 전쟁에서의 충군사상을 짙게 풍기고 있다.
경관시는 그 곳의 경관을 서술하는 것이 통례인데 곳곳에 서회를 깔아 놓은 것은 승속을 오갔던 그의 남다른 생애 탓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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