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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조

이순신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12. 4. 12.

이순신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 석야, 신 웅 순(시조시인 ․ 평론가 ․ 서예가, 중부대교수)

 

   1597년(선조 30년) 명 ․ 일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4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재침공해왔다. 정유재란이었다.

   선봉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와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는 이미 거제도와 서생포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고시니 유키나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간책을 썼다. 이순신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고니시 부하인 이중 첩자 요시라는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은밀히 접근했다.

   “화의가 결렬된 것은 가토 기요마사 때문이오. 그를 제거하면 나의 한도 풀리고 귀국의 근심도 제거될 것이오. 가토가 아무 날 바다를 건너올 터이니 잠복해 있다 엄습하면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요시라는 김응서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다.

   김응서는 왜의 술책임을 알면서도 조정에 장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정불고(知情不告:사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음)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적을 사로잡으라 명했다.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을 많이 출동 하면 적이 알게 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

   이순신은 적의 흉계인 줄 알고 출동하지 않았다. 그날 가토는 다대포 앞바다에 출현했다가 그대로 서생포로 향했다. 우리군을 유인하고자했던 것이다.

   경상 우수사 원균은 전부터 이순신에게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했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는 모함이었다.

   선조는 크게 노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 대한 처벌 상소가 빗발쳤다. 유성룡, 이원익의 간청에도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그리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자리를 대신토록 했다.

   이순신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죽음 직전 정탁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다. 그는 권율 막하의 일개 군졸로 들어갔다. 두 번째의 백의 종군이었다.

막하로 가는 도중 어머니의 부음을 받았다. 이순신은 아산으로 향했다. 영전에 통곡하고는 곧바로 초계 임지로 떠났다.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세상 천지에 나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순신은 한탄했다.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거제도 칠전량 전투에서 왜군에게 대파되었다. 장졸과 함선 대부분을 잃었고 이순신이 축척해두었던 막강한 전비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원균 자신도 배를 버리고 육상으로 달아나다 적병의 칼에 맞아 죽었다.

   패보가 알려지자 조정은 당황했다. 선조는 비국대신들을 불러 의논했으나 뽀족한 대책이 없었다. 이항복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했다.

   통제사에 재기용된 이순신은 남해 등지를 살폈으나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전부였다. 도저히 왜군과 맞설 수 없는 형편없는 전비였다. 조정에서는 수군을 폐하고 육군만으로 적을 공략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의 불가함을 아뢰었다.

   “신이 아직 죽지 않았고 열두척의 배가 있으니(微臣不死 尙有十二) 죽을 힘을 다해 싸울 뿐입니다.”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비장한 결의로 전투에 임했다.

   마침내 명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2척으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대전과를 올린 것이다. 통제사로 재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었고 수군의 사기를 진작시킨 대 해전이었다. 명량 대첩은 풍전등화였던 나라를 구한, 역사에 길이 남을 중대 사건이었다.

   1598년 11월 19일 일본군은 퇴각하기 위해 500여척의 전병력을 노량 앞바다에 집결해놓았다. 조선 수군은 명나라 수군과 함께 적의 퇴로를 막고 총 공격을 감행했다.

   이순신은 진두에 서서 퇴각하는 적선을 향해 맹공격을 가했다. 포연이 하늘을 덮었다. 적선 400척을 격침시키고 일본 수군 수만명을 도살 또는 수장시켰다. 도망친 적선은 겨우 50여척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도망가는 왜군을 끝까지 추격하다 그만 적의 유탄에 맞아 쓰러졌다.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말고 독전을 계속하라.”

   이순신은 이 마지막 말을 아들 회에게 남기고 54세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문욱은 회의 통곡을 그치게 하고 보이지 않게 잔군의 시신을 가렸다. 둥둥둥 북을 울렸다. 그리고 깃발을 휘두르며 독전을 계속했다. 군사들은 분전하며 퇴각하는 왜군을 모조리 섬멸시켰다. 죽은 이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친 것이다.

명나라 장수 진린은 싸움이 끝난 후에야 장군의 죽음을 알았다. 그는 배에서 세 번씩이나 엎어지면서 실로 고금에 그만한 자 다시는 없다고 했다.

   노량해전의 대승으로 지루했던 7년간의 임진왜란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한 사람의 위대한 희생이 전쟁을 일시에 종식시킨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순신을 동양의 넬슨이라고 칭송했다.

   도꾸도미의 『근세일본국민사』에는 이순신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나서도 이겼다. 조선역의 전후 7년 간에 걸쳐 조선국의 책사․변사․ 문사는 많았으나 전쟁에서는 참으로 이순신 한사람으로써 자랑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일본 수군의 장수들은 이순신이 살아 있을 때에 기를 펴지 못했다. 그는 실로 조선역에 있어서 조선의 영웅일뿐 아니라 동양 3국을 통해서 최고의 영웅이었다.

 

   이순신(1545,인종 1-1598,선조 31)은 조선 중기의 명장이다.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이다. 어버지는 정이며 어머니는 초계 변씨로 수림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으며 같은 마을 출신인 서애 유성룡과는 죽마고우이다. 문반 출신이었으나 22세 붓을 던지고 무예를 닦기 시작했다. 32세 때 식년무과에 병과로 합격, 이 후 무인의 길을 걸었다.

   그가 사복시주부를 거쳐 녹도둔전사의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이순신은 국방 강화를 위해 중앙에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정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 때 호인이 침입했다. 적은 군사로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었다. 피할 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것이 전부 이순신의 죄라하여 책임을 물었다. 그는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판결에 불복,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중형은 면했으나 조정은 그에게 백의 종군을 명했다. 첫 번째의 백의종군이었다.

   정읍현감, 절충장군, 만포점사, 진도군수를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1591년 47세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부임 후 왜구의 내침을 예견하고 군비를 점검하는 등 철갑선인 거북선 건조에 착수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 당포, 당항포 등에서 거북선을 앞세워 적을 크게 격파했다. 한산도 대첩으로 남해의 전 제해권을 장악했으며 안골포와 부산포에서도 왜군을 대파하는 등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 한산도로 본영을 옮겨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한산섬’ 시조는 이 때 진중에서 지은 것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갈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수루는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성 위에 만든 누각이다. 일성호가는 한 가닥 오랑캐의 피리 소리를 말한다. 호가는 호인들이 갈잎을 말아서 불던 것으로 몹시 슬픈 소리를 낸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을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때에 어디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가 나의 창자를 끊는듯 하구나.

   국운이 장군의 두 어깨에 달려 있을 때 홀로 적군과 맞서 싸웠던 장수의 우국충정이 시조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나라의 운명이 어찌 전개되고 있었는지 이 시조 하나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643년 (인조21)충무의 시호가 추증되고 1704년 유생들의 발의로 아산에 현충사가 세워졌다. 충무의 충렬사, 순천의 충민사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난중일기』와 한시 20여수, 시조 1수가 전한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은 “하늘을 날줄 삼고 땅을 씨줄 삼아 천하를 경륜할 인재요,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킬 만한 큰 공로를 세웠다.(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라고 평했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징비록』에서 유성룡은 이순신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 의 문 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하려 하였 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선조실록』에서 사관은 그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 (良將)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 있겠는가.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 ․ 정유년 새 통제사를 갈 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을 초래하여 양호지방(兩湖地方 충청 ․ 전라도)이 적의 소굴이 되 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

 

   정인보는 『이충무공순신기념비』에서 성자이며 명장이라고 했으며 천관우 역시 『한국사의 재발견』에서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기에 그도 성자이며 영웅이라고 했다.

   이순신 !

   죽음으로 나라를 구한 지극한 충렬의 정신, 그 숭고한 인격과 위대한 통솔력은 천추에 길이 남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며 등불이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었던 살신성인, 이순신. 진정 그는 위대한 성자였다. 혼탁한 세상일수록 그의 정신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월간서예』(2011,3월호,미술문화원),156-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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