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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조

김인후의 ‘엊그제 버힌 솔이…’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12. 4. 12.

김인후의 ‘엊그제 버힌 솔이…’

 

 

 

 

 

 

 

 

 

 

* 석야, 신 웅 순(시조시인 ․ 평론가 ․ 서예가, 중부대교수)

 

 

   1547년(명종 2) 9월 양제역에서 한 벽서가 발견되었다.

   ‘여주가 위에서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밑에서 농권한다. 나라가 망할 때가 가까운 징조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느냐.’

   윤원형은 이것이 을사사옥의 잔당의 짓이라하여 송인수 ‧ 이약빙을 죽이고, 이언적 ‧ 정자 ‧ 노수신 ‧ 유희춘 ‧ 정황 ‧ 이담 ‧ 권발 ‧ 송희규 ‧ 백인걸 등 10여명을 귀양보냈다.

   일명 벽서의 옥, 정미사화라 한다.

 

 

   엊그제 버힌 솔이 낙락장송 아니런가

   적은덧 두었든들 동량제 되리러니

   어즈버 명당이 기울면 어느 남ㄱ이 받치랴

 

 

   동량제는 훌륭한 인재, 임형수를 일컫는다. 명당은 임금이 신하들의 조현을 받는 정전이다. 여기서는 13세의 나이로 즉위한 명종의 조정을 가리키고 있다. 엊그제 베어진 솔이 낙락장송 아니던가. 잠깐 동안 두었던들 기둥감이 되었으리. 아, 조정이 기울면 어느 나무가 받칠 수 있으랴.

   어느날 윤원형이 홍문관 부제학, 임형수와 술자리를 마련했다. 임형수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 자, 어서 드시지요, 부제학.”

   임형수가 윤원형을 노려보았다.

   “ 공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주량껏 마시겠소.”

   윤원형이 새파랗게 질려 자리를 떴다. 형수는 제주 목사로 쫒겨났다. 이어 파직, 나주의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금부 도사가 나주까지 달려왔다. 그도 송인수 처럼 벽서 사건에 연루되었다. 윤원형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

임형수는 그 자리에서 부모님이 계신 방쪽을 향해 두 번 절했다.

   그리고 10살도 채 안된 아들을 불러 유언했다.

   “ 글을 배우지 말라. ”

   돌아가려고 하는 아이를 다시 불러 세웠다.

   “ 글을 배우지 않으면 무식할 사람이 될 터이니 글은 배우되 과거는 보지 마라.”

   그는 사약을 들이켰으나 죽지 않았다.

   “ 이 술잔은 주고 받는 일이 없어 독주라 하는구나.”

   그는 두 사발을 더 들이마셨다. 죽지 않자 목을 졸라 죽였다. 43세의 아까운 나이었다. 모두가 형수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이황은 “ 참으로 재주가 기이한 사람이었는데 죄없이 죽어 원통하구나.” 하고 슬픔을 금치 못했다.

   하서 김인후는 임형수의 죽음을 애통해해 위 시조,‘도임사수원사작단가(悼林士遂寃死作短歌)’ 를 지었다. 사수는 임형수의 자이다. 임형수는 하서와 교분이 두터웠다. 하서는 촉망되던 동량재의 희생을 가슴 아파한 것이다.

   김인후(金麟厚, 1510,중종 5- 1560,명종,15). 자는 후지 호는 하서 또는 담재, 전라도 장성 출신. 김안국에서 소학을 배웠고 1531년 성균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이황 등 교우가 두터웠으며 노수신, 기대승과도 사귀었다.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사가독서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

 

   용모가 단정하고 풍신이 수량하여 일신 밖의 물욕은 하나도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서적과 한 묵만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채소의 껍질을 쪼개는데 반드시 알맹이가 나오기까지 쪼개면서 말하 되 “ 생리의 본말을 보려고 그리한다.”하였다. 9세 때 복제 기준이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기었다. 차츰 장성하매 조용히 무엇을 생각함인지 묵묵히 앉아서 밤을 새웠다.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인후를 만나보고 크게 기뻐하여 은우가 날로 융성하여 혹은 친히 숙직 하는 곳에 이르러 조용히 서로 토론도 하고 특별히 서책도 주며 또 먹으로 대나무를 그려 주어서 은미한 뜻을 붙이매 인후가 시를 지어 사례했다.

   동궁에 불이 나매 인후가 잡자를 올리되 “기묘사화는 조야가 모두 그 원통하고 억울함을 불쌍 히 여기나 지금까지 본심을 개진하며 죄 없음을 드러내어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하였는데 그 말이 절실하고 곡진하였다. 인종이 즉하던 처음에 쾌히 신설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대개 인후가 그 기틀을 열어 놓은 것이다. 봉양하기 위하여 옥과 감무로 나갔는데 민정에 맞추어 다스리매 일 경이 편안하였다.을사에 인종이 승하하매 놀라고 슲어하여 까무러졌다가 다시 깨어났다. 인하여 병으로 벼슬을 사면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여러 번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선영 옆 에 서재를 짓고 ‘담재(湛齋)’라 편액하고 인하여 호를 삼았다. (이가원,『이조명인열전』(을지문화사,1965), 326-337쪽.)

 

   제자로는 정철 ‧ 변성온 ‧ 기효간 ‧ 조희문 ‧ 오건 등이 있으며 1796년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기 이원론(理氣二元論)의 견해를 취했으며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장성의 필암서원, 옥과의 영귀 선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 저서로는 『하서집』이 있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山) 절로 수(水)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자연가’이다. 청산도 절로 녹수도 절로 나도 절로. 기발한 착상에 절묘한 표현이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만물은 자연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유희춘이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가게 되었다. 김인후는 그의 아들이 혼사길이 막히자 나이와 인물됨이 맞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위로 맞아들였다.

   우산 안방준은 ‘하서는 맑은 물에 연꽃 같기도 하고 광풍(光風) ‧ 제월(霽月) 같기도 하여 출처의 바른 것이 비교할 이가 없다.’하였다.

   하서는 진흙 속에서도 맑고 깨끗하게 피는 연꽃 중의 연꽃이었다. 이를 두고 군자라 하지 않던가. 인간은 백년도 못 살지만 그 향기는 천년을 간다. 하서가 바로 그런 군자였다.

 

『월간서예』(2010.10,월간서예사) . 144-145쪽.

 

 

 

필암서원 전경

 

 

인종이 하서에게 하사한 묵죽도

 

 

 

하서 유허비

 

 

 

하서 김인후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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