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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조

제 20 화 이덕형의 ‘달이 두렷하여…’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12. 4. 12.

제 20 화 이덕형의 ‘달이 두렷하여…’

 

 

 

 

 

 

* 석야, 신 웅 순(시조시인 ․ 평론가 ․ 서예가, 중부대교수)

 

 

 

 

   1592년 일본군 21만명이 조선을 침공했다.

   평양이 함락되었다. 선조는 중신들에게 계책을 물었다.

   “사세가 급하오니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해야 하나이다.”

   이항복의 말에 이덕형이 거들었다.

   “누가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단 말인가.”

   “신들이 달려가겠나이다.”

   이항복은 병조판서로 갈 수가 없었다. 이덕형이 이 일을 맡았다.

   “길을 곱이나 빨리 달리는 쾌속한 말이 없어서 한이라.”

   항복은 자기가 타던 말을 이덕형에게 내주었다.

   “군사가 오지 않으면 나를 다시 만날 생각하지 말라.”

   “군사가 오지 않으면 내가 뼈를 노룡(盧龍)에 버리고 압록강을 두 번 다시 건너지 않겠 네.”

이덕형은 이항복과 눈물로 작별했다.

   이덕형은 명나라 조정에 여섯 번이나 글을 올렸다. 명나라는 5만 대군을 조선에 파병했다. 이로 인해 전쟁의 판도가 바뀌었다.

   1613년 6월 김제남이 사사되었다. 그 해 7월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당했다.

   영의정 이덕형은 엎드려 청을 올렸다.

   “영창을 대궐 문 밖에 나가 살도록 하여주옵소서.”

   영창을 살기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영창 대군은 폐서인되어 궐 밖으로 쫒겨났다.

   “어린 영창을 형으로서 다스려서는 아니되옵니다.”

   이덕형은 비장한 상소를 올렸다. 탄핵이 빗발쳤다. 1613년 7월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 그 이듬해에 9세의 나이로 죽었다. 일련의 일들은 대북당 이이첨의 조작극이었다.

   이덕형은 삭탈 관직, 서울을 떠났다.

   한음이 대궐에서 쫓겨난 뒤 세간에서는 이상한 소문들이 나돌았다.

   신선이 강 머리에서 이덕형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 신선이 이덕형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주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집이 광릉에 있는데 강 서쪽 국화가 곱게 피어

절후가 늦으니 낙엽은 소소하고 바람조차 차구나

창 앞의 두견새가 돌아가기를 재촉하니

유인(幽人)의 옛집을 그리워함을 아는 듯 해라

 

 

家在光陵江水西

黃花冉冉節何晩

落葉蕭蕭風更凄

窓外杜鵑催歸去

似識幽人戀舊棲

 

 

   또한 큰 호랑이가 한강 나루터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한음이 나타나자 길을 인도하여 용진사제까지 무사히 당도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덕형은 양근, 시골집으로 돌아가 식음을 전폐, 술로 세월을 보냈다. 나라를 생각하다 그 해에 죽었다.

이성령(李星齡)의 『일월록(日月錄)』과 이원(李 愿)의 『저정집(樗亭集)』에 한음이 세상을 버리던 날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한음이 세상을 버리던 날 흰 기운이 온 집에 가득 차고 오색영롱한 구름이 하늘을 덮어 사람 들의 눈을 어지럽게 하였다. 시중의 백성들은 한음의 별세를 하늘이 애석하게 여겨 이러한 일이 일어난 줄 믿고 장사를 걷어치우고 거리에 나와 통곡했으며 한음의 도저동(桃楮洞 : 지금의 중구 도동 일대) 자택에는 부조를 바치려는 백성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덕형(1561,명종 16- 1613,광해군 5). 조선 중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이다. 자는 명보 호는 한음이며 영의정 이산해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고 침착했다. 1580년 19세로 별시문과에 급제, 승무원 관원이 되었다. 1583년 이항복과 함께 사가 독서를 했으며 이듬해 서총대의 응제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부수찬 ․ 정언 ․ 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 사신 겐소 등을 접대하여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1591년 예조참판에 대제학을 겸했고 1602년 41세의 나이로 영의정이 되었다.

 

 

달이 두렷하여 벽공에 걸렸으니

만고 풍상에 떨어짐즉 하다마는

지금히 취객을 위하여 장조금준(長照金樽) 하노매

 

 

   둥근달이 푸른 하늘에 걸렸으니 바람, 서리 오랜 세월에 떨어짐직도 한데 떨어지지 않음은 지금 이 취객을 위해 술잔을 오래 비추기 위한 것이리라. 애주가의 호방한 기질이 엿보인다. ‘만고 풍상에 저 달이 떨어짐즉 하다마는’ 이 구절이 뛰어나다. 언제 지었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한음은 친구 오성이 생각날 때마다 술을 마시며 울었다고 전해진다. 오성과 헤어져 지내던 만년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나머지 시조 한 수도 술에 관한 시조이다. 애주가 중의 애주가였던 모양이다.

 

 

큰 잔에 가득 부어 취토록 먹으면서

만고(萬古) 영웅(英雄)을 손꼽아 헤어 보니

아마도 유영(劉伶) 이백(李白)이 내 벗인가 하노라

 

 

   한음 일생에 가장 가까웠던 친구로 묵재 이귀, 백사 이항복, 노계 박인로가 있다. 노계는 경상도 영천 광주이씨 시조 산소가 있는 바로 그 동네 사람이다. 한음이 경상도 체찰사를 지낼 때 시조 산소 부근의 노계 조부 산소에 참배하면서 서로 가까워졌다.

   노계가 영천에 도체찰사로 머물던 한음 이덕형을 찾아갔다. 한음은 노계에게 조홍감을 내놓았다. 그 유명한 박인로의「조홍시가」가 그 때 지어진 시조이다. 육적(陸績)의 회귤(懷橘) 고사를 연상하며 돌아가신 어버이를 생각하며 지었다.

한음이 은퇴하여 용진에서 은거했을 때였다. 말년의 절친한 벗 노계는 한음의 말을 듣고가사 「사제곡」을 썼다. 용진 진나루 사제마을의 아름다운 옛 모습과 광해조를 걱정하는 한음상공의 말년 심정을 표현했다.

   글씨에 뛰어났고 포천의 용연서원, 상주의 근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한음문고』가 있으며 시호는 문익이다.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하고 있다.

   길지도 않은 인생에 수많은 눈비들이 왔다가 간다. 적막으로 남는 것들도, 고요로 남는 것들도 있다. 한으로 남는 것들도 있다. 훗날 후손들이 그것을 본다고 생각하면 식은 땀이 흐른다. 어떻게 인생이 남아야 할 것인가. 한음은 그것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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