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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조

성혼의 ‘말없는 청산이요…’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12. 4. 11.

성혼의 ‘말없는 청산이요…’

 

 

* 석야, 신 웅 순

 

 

말없는 청산이요 태없는 유수로다

값없는 청풍이요 임자없는 명월이라

이중에 병없는 이 몸이 분별없이 늙으리라

 

 

   청산은 말이 없고 흐르는 물은 태가 없다. 맑은 바람은 값이 없고 밝은 달은 임자가 없다. 이 중에 병 없는 이 몸이 걱정 없이 늙으리라. 세상 시비에 얽매이지 않고 청풍 명월과 벗하며 병 없이 늙다가 떠나고 싶은 무욕, 탈속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값없는 청풍, 임자 없는 명월’은 송나라 소식의 「적벽부」에서 나온 말이다. ‘대저 천지 사이의 사물에는 각기 주인이 있어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터럭일지라도 가지지 말 것이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귀로 얻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만나면 빛을 이루어 이를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이를 써도 다함이 없으니’라는 시가 있다.

   성혼(1535, 중종 30-1598, 선조 31)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해동 18현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창령 호는 우계(牛溪), 조광조의 문인이자 학덕이 높았던 성수침의 아들이다. 서울 순화방에서 출생했고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살았다. 백인걸의 제자이다.

   17세에 초시에 합격했으나 병으로 인해 복시에 응하지 못했다. 이 후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1554년 같은 고을 이이와 사귀면서 그와는 평생지기가 되었다.

 

언젠가 한 선비가 율곡을 찾아갔는데 율곡이 술에 취해 누워서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그 선비가 율곡을 찾아간 것을 후회하고 돌아와 우계에게 자기가 겪은 일을 알렸다. 그러자 우계가 ‘이 친구 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다. 필경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 그날 성상께서 궁궐에 빚은 귀중 한 술을 하사한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하고는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했더니 정말로 그런 일이 있 었다.(김권섭,『선비의 탄생』(다산북스,2008),150쪽.)

 

   율곡과 우계는 이렇게 서로의 깊은 믿음과 신뢰가 있었다. 율곡와 우계는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이기론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했다. 주로 우계가 묻고 율곡이 답변하는 형식이었는데 우계는 퇴계 이황의 이론을 따랐고 율곡은 고봉 기대승과 의견이 비슷했다. 그런 까닭에 두 사람의 철학적 논변은 매우 치열했다. 이에 대해 율곡은 논리는 자기가 더 분명하나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는 면에서는 우계를 따르지 못한다고 보았다. (위의 책,152쪽.)

   율곡은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임금에게 우계를 추천했다. 임금이 우계를 이따금 만나는 것만으로도 선한 도를 널리 펼치는 데 보탬이 될 거라고 율곡은 믿었기 때문이었다.

 

시절이 태평토다 이 몸이 한가커니

죽림심처(竹林深處)에 오계성(午鷄聲)이 아니런들

깊이 든 일장화서몽(一場華胥夢)을 어느 벗이 깨우리

 

   은사의 한가한 경지를 우계는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한 한가로움을 깨뜨리는 것이 낮에 우는 죽림심처의 닭울음 소리라고 했다.

   화서는 자연무위(自然無爲)의 태평한 나라로, 이상향을 뜻한다. 『열자(列子)』의 「황제편(黃帝篇)」에 나오는 말이다. 황제는 천하가 뜻대로 다스려지지 않자 정치를 단념했다. 하루는 낮잠을 잤는데, 만사가 자연무위로 잘 다스려지는 화서라는 나라에서 노니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나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 후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한다. 기분 좋게 낮잠 자는 것을 ‘화서의 나라에서 노닌다’고 한다. 깊이 든 한 바탕 화서지몽을 어느 벗이 깨우겠느냐는 것이다.

   성혼은 세상 일에 얽매이지 않고 강호자연, 무위자연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했다. 그런 성혼이었기에 나라에서 여러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대부분 고사하고 벼슬을 했어도 이내 사직하고 물러나곤했다. 그가 조정에서 벼슬한 날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주로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우계’는 그가 살았던 파주군 파평면 늘로리의 앞냇물 이름이다.

   1584년 율곡이 죽자 서인의 영수 가운데서 중진 지도자가 되어 동인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그는 당파에 구애되지 않았다.

   1584년 2월 우계가 중봉 조헌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글귀가 있다.

 

하늘이 율곡을 앗아갔으니 어쩌면 이리도 참혹하단 말입니까. 이제는 만사가 끝났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나도 위장병과 어지러운 증세가 일어나 몸이 망가져서 머지 않아 죽게 될 것이니, 이른바 “슬퍼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며 슬퍼하지 않을 날이 무궁하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 경험 하게 될 것입니다.

(위의 책,157쪽.)

 

   성혼의 율곡에 대한 상심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성혼은 정철과도 평생지기였다. 우계는 송강보다 한살 위이고 우계보다 5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우계와 송강이 주고 받은 시문 편지는 상당수에 이른다. 벼슬길에 나아가 있을 때나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나 일상에서 겪는 많은 문제들을 상의하고 충고하는 편지의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그들 사이에는 돈독한 우정과 깊을 신뢰가 있었다.

   송강을 떠나 보내는 우계의 마음은 착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송강이 죽은 그 이듬해 우계는 다음과 같이 제문을 지어 곡했다.

 

형이 돌아간 뒤 해가 넘어서 비로소 나는 와서 곡을 하며 곡으로써 슬픔을 다하려 하나, 슬픈 심 경이 끝이 없구려.

아아, 어지러운 세상에는 오래 사는 것이 괴로운 일이구려. 사는 것이 괴로울 진대 죽는 것이 또 어찌 슬프오리까. 혼탁한 세상에서 벗어난 형의 꽤가 옳은 것이라 생각되오. 여윈 살은 뼈에 붙고 백 가지 걱정은 마음 속에 스며드오. 어느 때든지 형의 뒤를 따르겠으니, 앎이 있을진대 아마도 저승에서 다시 만나게 되오리라. (박영주,『송강평전』(고요아침, 2003),296쪽.)

 

   온갖 근심으로 괴로워 하느니 일찍 떠난 형의 꽤가 옳다는 우계의 노년의 착찹한 심경을 읽을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궤의 의병군중의 군무를 도왔고 이어 대사헌,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그는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 화의를 주장하다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 왕이 파천할 때 파주에서 나와 맞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함을 받기도 했다. 이후로 그는 파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뒤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에 복관사제가 되었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여산의 죽림서원, 창령의 물계서원, 해주의 소현서원, 함흥의 운전서원, 파주의 파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우계집』6권 6책과 『주문지결』1권 1책이 있다. 『화원악보』,『청구영언』,『동가선』에 시조 3수가 전하고 있다.

   그의 벼슬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올바로 살려하나 올바로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랫동안 벼슬길에 있었다면 그도 많은 근심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는 실천하는 선비였다.그나마 초야에 묻혀 학문과 교육에 힘썼으니 그래도 그만이라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 『기행문학』(한국기행문학회 2011 여름호),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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