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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조

강호에 봄이드니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12. 4. 11.

강호에 봄이드니-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석야, 신 웅 순

 

   맹사성(고려 공민왕 9,1359-조선20,1438)은 여말, 조선초 문신으로 본관은 신창, 호는 고불이며, 최영 장군의 손서이다.

    최영 장군이 하루는 낮잠을 자고 있는데 꿈에 배나무 밭에서 용이 승천하길래 놀라 깨어 밖으 로 나가 보았다.동네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가 배를 따고 있었다.아이들을 꾸짖자 모두 달아나는데 한 아이만이 배를 가지고 와서 잘못을 고했다. 최장군은 누구집 자식인지 물었다. 아버지는 맹희 도이고 할아버지는 맹유라고 했다. 최영과 맹유는 서로 잘 아는 처지였다. 최장군은 맹유를 찾아 갔다. 꿈 이야기를 하고 예의바른 손자를 칭찬했다. 그 인연으로 최장군은 그 아이를 훗날 손녀 사위로 삼게 되는데, 그가 맹유의 손자이고 맹희도의 아들인 맹사성이다. (하시명,『역사를 추적하는 조선 문인기행』(오늘의 책,2002)19쪽.)

    조부 맹유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순절했고 아버지 맹희도는 출사 없이 절의를 지켰다. 맹사성은 우왕 12년에 문과 급제, 조선조에 들어와 대사헌, 판서를 거쳐 좌의정으로 세종 17년(1435) 벼슬에서 물러났다. 조선조 500년사에 명재상으로 황희, 이원익과 함께 청백리에 봉해졌다. 얼마나 청렴했는지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병조 판서가 집을 찾았다.마침 소낙비가 내려 고불의 집이 온통 물벼락을 맞고 있었다.여기저기 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병조판서의 의관이 다 젖었다. 고불은 새는 물방울을 피해 앉으며 군시렁 거렀다.

“ 하필 손님이 계실 때 소낙비가 쏟아질게 뭐람.”

병도 판서는 마침 사랑채를 크게 짓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당장 공사를 중단시켰다.

“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사랑채가 필요하겠는가.”(최범서,『야사로본 조선역사』(가람기획,2003(,155-156)

   맹사성은 음율에도 밝았다. 풍해도도관찰사로 임명되었을 때 영의정 하륜이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을 가르치도록 왕께 건의할 정도였다. 피리소리가 들리면 고불이 집에 있다는 표시였다. 언제나 피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내키면 한 곡조씩 불렀다. 스스로 악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토록 음률을 즐기고 사랑했다.

   어느날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뵈러 온양에 간 일이 있었다. 고불이 온양으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고을 수령은 장호원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이 때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갔다.

“ 웬 늙은이가 재상 행차에 소를 타고 지나가느냐? ”

수령 관졸들이 버릇이 없다고 꾸짖었다.

고불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온양에 사는 고불이라고 수령들에게 이르시게.”

   수령들은 기겁하여 달아났다. 당장 물고를 낼 것 같아서였다. 달아나다 그만 연못에 수령의 관인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뒤에 그 연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고 불렀다. 소를 타고 갔기에 사람들은 그가 재상인 줄 몰랐다.(위의 책,157쪽) 그는 출입시 이렇게 자주 소를 즐겨 타고 다녔다.

   고불은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고 엄하지 않았다고 한다.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의 예를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였다. 그리고 윗자리에 앉혔으며 돌아갈 때에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그렇게 그는 겸손했다.

   그가 우의정 재임시 『태종실록』편찬 감관사로서 감수한 일이 있었다.『태종실록』이 편찬되자 세종이 한 번 보고자 했다.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 이라고 반대했다. 이에 세종은 그의 말을 따랐다. 품성은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정사에는 과단성이 있었다.

   유형원의 『대동여지지』에 최영 장군의 집은 원래 "홍주에서 동쪽으로 23리 떨어진 삼봉산 아래 적동리에 있고 후에 성삼문이 거기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영 장군은 홍북면 노은리에서 태어났다. 1330년 최영이 15살 때 아버지 최원직이 이사를 와 지금의 맹씨 고택을 짓고 살았다. 이성계에 의해 멸족하기 전까지만 해도 최영 장군 은 이 맹씨 행단의 주인이었다. 버려진 최영 장군의 집에 와 산 사람이 바로 맹사성 아버지 맹희도였다. 아버지 맹희도는 선산이 있던 충남 서천군 한산면 추동리에 잠시 머물렀다가 온양의 최영 장군 집으로 와 개수해서 살았다. <행단 고택 중수 유래현판 게시문> 에는 ‘비록 빈한한 국면이나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근심을 같이 하리라. 또한 정밀하게 역학을 연구하고 후생을 교육한다면 금학(今學)이 스스로 깃들리라 하시고 종신토록 나가지 않으셨다.’고 한다. (허시명,앞의 책,20쪽)

   두 인물이 같은 집에 태어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최영 장군이 살았던 원 집에는 100년 후 성삼문이 나왔고 이사했던 최영 장군의 집에선 명재상 맹사성이 나왔다. 최영 장군의 집에 두 인물이 나왔으니 최영 장군은 죽어서도 두 인물을 배출한 위대한 인물이 된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치부하기엔 뭔가 숙연해진다.

   맹사성은 만년에 이 집에 살면서 자연의 아름다운 「강호사시가」를 지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 단시조(현대의 연시조와 다른, 같은 제목 하에 서로 다른 연이은 단시조를 말한다) 이며 훗날 강호가의 원지류가 되었다. 맹씨 행단 앞을 흐르는 금곡천을 배경으로 만년에 지은 시조로 추정된다.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계변(濁醪溪邊)에 금린어(錦鱗魚)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로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강호에 여름이 드는 초당에 일이 없다

유신(有信)한 강파(江波)는 보내느니 바람이라

이 몸이 서늘하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있다

소정(小艇)에 그물 실어 흘리띄워 던져두고

이 몸이 소일(消日)하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겨울이 드니 눈 깊이 자히 남다

삿갓 빗기 쓰고 누역으로 옷을 삼아

이 몸이 춥지 아니하옴도 역군은이샷다

 

   대 자연 속에 봄이 돌아오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시냇가에 탁주에 안주는 쏘가리로다. 이 몸이 한가한 것도 역시 임금님의 은혜이도다. 강호에 여름이 드니 초당에 일이 없다. 신의 있는 물결을 보내는 것은 바람이라. 이 몸이 서늘한 것도 임금님의 은혜로다. 강호에 가을이 오니 고기마다 살쪄있다. 작은 배에 그믈을 실어 물 위에 흘리게 띄워 던져두고 이 몸이 소일한 것도 임금님의 은혜로다. 강호에 겨울이 오니 눈 깊이가 한자가 넘는다. 삿갓을 비스듬히 쓰고 도롱이로 옷을 삼아 이 몸이 춥지 아니한 것도 임금님의 은혜로다.

   자연 만큼 정직한 것은 없다. 자연에 몸을 맡기며 유유자적하게 사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청백리 맹사성. 집은 허름하여 비가 새어도 마음은 풍성하고 겸손했던 맹사성. 진정 그는 재상다운 재상이었다. 재상은 적어도 마음과 영혼이 깨끗해야한다. 물욕이 영혼을 망친다. 살아서 재물을 많이 가져 뭣하겠는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땅도 잠시 빌려쓰고 있는 것일뿐 훗날 자손들이 살아가야할 땅이 아닌가.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는 말이 있다. 그래야 어느 누구도 훗날 만인의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시조시인 ․평론가,중부대교수.

 

 

 

 

                                                                                    맹사성 고택

 

 

 

금곡천 가의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시비  

 

 출전:신웅순,「맹사성의 '강호사시가'」,『월간서예』(미술문화원,2010,03),126-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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