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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조

이현보의 ‘농암에 올라보니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12. 4. 11.

이현보의 ‘농암에 올라보니…’

 

 

 

* 석야, 신 웅 순(시조시인․평론가․서예가, 중부대교수)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유명이로다

인사이 변한들 산천이딴 가실까

암전에 모수모수이 어제 본듯 하예라

 

   귀머거리 바위에 오르니 늙은 눈이 밝아진다. 사람 일에는 변함이 있지만 산천이야 변할 리 있겠느냐. 농암 앞을 흐르는 물과 언덕들이 어제 본 듯 그대로이구나.

   농암가이다. 지은이가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암 위에 올라 지은 시조이다.

   농암은 고향 예안의 분천리 분강가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이 바위에 초막을 지어 애일당이라 이름을 짓고 어버이의 쉼터로 만들며 자연을 벗 삼아 살았다. 강물 소리 때문에 아래에서 불러도 바위 위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여 ‘귀머거리 바위(농암)’이라 불렀다. 지은이가 이를 호로 삼은 것은 세상 명리에 못 들은 척 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으리라.

   이현보(1467,세조 13-1555,명종 10)는 조선 중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천, 호는 농암이다. 연산군 4년 문과에 급제했고 38세에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그러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박하다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정적이 또 그를 무고했다.

“전날에 철면을 쓰고 수염이 길게 난 자가 바로 큰 죄인인데 누구인지 이름을 몰랐더니 그가 바로 이현보입니다.”

   을축에 다시 옥에 갇혔다가 다시 배소로 돌려보냈다.

   중종 반정 후 풀려났으나 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불렀다. 소주도병은 겉은 검으나 속은 밝다는 뜻으로 그의 결백함을 칭찬한 것이다.

   밀양․안동 부사와 충주․성주 목사를 지냈으며 가는 곳마다 인재를 육성하는 데에 힘썼다. 동부 승지․부제학, 대구․경주 부윤을 거쳐 형조․호조 참판으로 있다가 1542년 76세 에 사직했다.

   물러갈 때 많은 관헌들이 나와 전송했다. 누구나 그의 높은 절조와 덕망을 존경치 않는 이가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살았다.

 

귀거래 귀거래하되 말뿐이요 갈 이 없어

전원이 장무하니 아니가고 어찌 할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명들명 기다리나니.

 

   효빈가이다. 작자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한강의 주상별연에서 도연명을 생각하며 ‘귀거래사’를 본 떠 지은 것이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하지만 말 뿐이고, 정말로 돌아간 이는 없구나. 밭과 뜰이 점점 황폐해져 가는데 아니가고 어찌할 것인가. 초당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나며들며 나를 기다리나니. 모두들 명리추구에 열심이지만 자신은 귀거래를 하겠다는 것이다.

   ‘전원장무’는 ‘귀거래사’의 첫구절 ‘귀거래혜(歸去來兮) 전원장무호불귀(田園將蕪胡不歸)을 그대로 옮겨쓴 것이다. 그만큼 도연명과 같이 귀거래해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을 사랑하며 살고 싶었던 것이다. 종장은 자신이 돌아가야할 전원 생활의 풍경을 말하고 있다.

   홍귀달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이황 · 황준량 등과 사귀었으며, 정문(程文)에 뛰어났다. 일찍이 실천유학에 뜻을 두어 중용사상, 특히 경(敬) 사상을 바탕으로 수양했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가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어부가」를 비롯「효빈가」․「농암가」․「생일가」 등 시조 8수가 전하고 있다. 조선 초기 시가에서 중기 시가로 이행하는데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89세에 졸했다. 예안의 분강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농암집』이 전하며 익호는 효절이다.

 

굽어는 천심녹수 돌아보니 만첩청산

십장 홍진이 언매나 가렷는고

강호에 월백하거든 더욱 무심하애라

 

   「어부가」단가 5장 중 둘째 수이다.

   굽어보니 깊고 푸른 물이요 돌아보니 첩첩 쌓인 푸른 산이라. 어수선한 세상사 얼마나 가렸는고, 강호에 달이 밝으니 더욱 사심이 없어지는구나. 속세를 떠난 자신의 무심한 심경을 노래한 시조이다. 세속의 공명을 잊고 표표히 살아가는 강호의 즐거움을 읊은 것이다.

   「어부가」는 고렵 말엽부터 작가 연대 미상으로 전하여 오던 것을 이현보가 원사 12장의 장가를 9장으로, 단가 10장을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다. 83살에 지었다. 강호생활의 흥취를 더하여 당대 유학자들에게 고려의 속요와 차원이 다른 새롭고 신선한 노래로 받아들여졌다. 이 작품들은 모두 후서가 붙어 있어서 창작 경위와 동기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후에 윤선도가 이 「어부가」를 바탕으로 개작한 것이「어부사시사」40수이다. 그밖에 5편의 부(賦)와 다수의 한시문이 전한다. 당시 영남 사림파에게 정신적·문학적 영향을 주어 영남가단을 형성하게 했다. 시조작가로서 그는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이후 윤선도(尹善道), 이형상(李衡祥), 이한진(李漢鎭)으로 이어지는 어부가의 계보가 형성되었다

   퇴계 이황은 농암을 가리켜 ‘부귀를 뜬 구름에 비기고, 고상하고 품위 있는 생각을 물외에 부쳐, 낚시터를 노니는 선생의 강호지락은 가히 진의를 얻었다.’고 평했다. (이광식,『우리옛시조여행,』(가람기획,2004),103쪽.)

그에게 있어서의 부귀는 뜬 구름이었고 그의 삶은 자연을 벗삼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그는 진정한 자유인이며 자연인이었다.

 

- 『월간서예』(2011.12. 미술문화원), 162-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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