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목향 정광옥 한글서예가
  • 목향 정광옥 서예가
우리의 시조

남구만의 ‘동창이 밝았느냐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12. 4. 11.

남구만의 ‘동창이 밝았느냐…’

 

 

 

* 신 웅 순

 

 

   “원자로 명호를 정하라. ”

   1689년 숙종 15년 1월 숙종은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명호를 정했다. 그리고 소의장씨를 희빈으로 승격시켰다.     명호를 정한다는 것은 세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의정을 비롯한 이조 ․ 호조 ․ 병조 ․ 공조 모든 서인들이 반기를 들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상소를 올렸다.

   “원자의 정호가 너무 일러 가당치 않사옵니다.”

   “왕을 능별하려드는것이냐.”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고 제주도에 위리 안치하라.”

   그는 정읍에 이르러 사약을 받았다. 서인들이 제거되었고 남인들이 집권했다.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고 그 자리에 희비 장씨가 들어앉았다.

   이를 기사환국이라 한다.

   이 때 서인, 남구만도 강릉으로 유배되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해놈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1689년(숙종 15년) 남구만은 강릉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심곡 마을에 이르러 자연 경관과 천혜의 약천수에 그만 매료되었다. 여기에 심일 서당을 짓고 후진을 교육시키며 유배 생활을 했다. 이 곳에서 시조를 지었다. 그 유명한 시조 ‘동창이…’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그 해가 1689년 봄이었다. 이듬해 그는 유배 생활에서 풀려났다.

   고시조의 대표적인 시조, 권농가이다. 동창이 밝았느냐. 벌써 종달새가 떠서 지저귀는구나. 이렇게 늑장 부리다가 재 너머 긴 밭을 언제 갈려고 하느냐. 소 먹일 아이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느냐. 일찍 잠이 깬 영감님이 소치는 아이에게 빨리 일어나라고 성화댄다. 농촌의 아침 풍경이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마을에는 재 너머와 사래긴밭, '발락재'와 '장밭(長田)'이 실제로 소재하고 있다. 약천은 거기를 오가며 당쟁으로 지친 정신과 육체를 가다듬었을 것이다. 그가 떠난 후 마을 사람들은 그를 흠모하여 약천사를 짓고 영정을 모셨다. 지금도 그 곳을 영당말이라고 부르고 있다.

   ‘동창이 밝았느냐…’ 이 시조는 만년에 낙향한 모현면 갈담리 비파담(琵琶譚)에서 썼다는 말도 있고 약천의 생가인 홍성군 내현리 ‘거북이 마을’ 약천초당(藥泉草堂)에서 지었다는 말도 있다.

   1694년에 갑술 옥사가 일어났다. 남인이 몰락하고 다시 서인이 집권했다. 폐비 민씨가 돌아오고 왕후 장씨가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장희빈은 취선당에서 저주의 세월을 보냈다. 거기에 신당을 차려놓고 중전의 화상에 매일 화살을 쏘아댔다. 종이가 찢어지면 수의를 입혀 시체 화상을 연못에다 내던졌다.

   왕이 이를 목격했다.

   “장씨에게 사약을 내려라.”

   세자는 애걸했다.

   “아바마마, 제발 어머니를 살여주옵소서.”

   “전하, 제발 사형만은 면케 해주옵소서.”

   남구만은 훗날 세자의 큰 충격을 생각해 살려 줄 것을 빌었다. 그의 충정에도 결국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말았다. 이 일로 남구만은 사직되고, 지금의 용인으로 낙향했다. 그 뒤 부처(付處) ․ 파직 등 파란을 겪다 다시 서용되기도 했으나 1707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남구만(1629,인조 7- 1711,숙종 37)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 자는 운로(雲路)이며 호는 약천(藥泉), 미재(美齋)이다. 개국 공신 남재의 후손으로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51년 사마시를 거쳐, 1656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674년에는 함경도 관찰사로 유학을 진흥시키고 변경 수비를 튼튼히 했다.

이때 북변의 형편을 그려 올리며 임금께 무산부(茂山府)를 설치해줄 것을 청했다. 임금이 경연에서 재신들에게 그림을 펴보이며 말했다.

   “재주와 학식을 참으로 따를 수 없다.”

   1679년에 한성부 좌윤을 지내고 서인으로서 윤휴 ‧ 허견 등 남인을 탄핵하다 남해로 유배되었다. 1683년 병조판서, 서인이 노 ․ 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이후 우의정 ‧ 좌의정을 거쳐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경신대출척, 기사환국, 갑술 옥사를 거치면서 사색 당파로 부침을 거듭했던 소론의 거두 남구만. 정치 운영의 중심 인물로 정치 ․ 경제 ․ 형정 ․ 군정인제등용 ․ 의례 등 국정 전반에 걸쳐 경륜을 폈다. 법을 받들어 사사로움이 없었고 매사 붕당을 염려해 오직 공의를 따랐다.

   약천은 이조참의로 있다가 파직되어 고향인 결성으로 낙향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낚시꾼을 만나 그와의 대화에서 심오한 인생 철학을 깨우쳤다고 한다. 고기를 낚는 방법을 구경하다 자연히 낚시하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법(法)이니, 묘리를 어찌 말로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만일 가르 쳐 줄 수 있다면 또 이른바 묘리가 아니다. 기어이 말하라고 한다면 한 가지 할 말이 있으니, 그 대가 나의 법을 지켜 아침에도 낚싯대를 드리우고 저녁에도 낚싯대를 드리워서 온 정신을 쏟고 마음을 다하여 날짜가 쌓이고 달수가 오래되어 익히고 익혀 이루어지면 손이 우선 그 알맞음을 가늠하고 마음이 우선 앎을 터득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혹 묘리를 터득할 수도 있고 터득하 지 못할 수도 있으며, 혹 그 은미한 것까지 통달하고 지극한 묘리를 다할 수도 있으며, 그중 한 가지만 깨닫고 두세 가지는 모를 수도 있으며, 혹은 하나도 알지 못하여 도리어 스스로 의혹할 수도 있으며, 혹은 황홀하게 스스로 깨닫되 깨닫게 된 소이(所以)를 자신도 알지 못할 수도 있으 니, 이는 모두 그대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내가 어찌 간여할 수 있겠는가. 내 그대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나는 이에 낚싯대를 던지고 감탄하기를 “손님의 말씀이 참으로 훌륭하다. 이 도를 미루어 나간 다면 어찌 다만 낚시질에 쓸 뿐이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비유할 수 있 다.’ 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은 종류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낚시를 하는 방법은 가르쳐 드릴 수 있어도 그 묘리는 스스로 배워서 터득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많은 고기를 낚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가 남긴 시조 한편 ‘동창이 밝았느냐’가 진본 청구영언에 전한다. 시호는 문충이다. 문집으로『약천집』과『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註)』가 있다. 국내외 기행문과 우리 역사에 대한 고증도 남기고 있고 책문(冊文) ․ 반교문(頒敎文) ․ 묘지명 등도 썼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서화에도 능했다.

   사후에 숙종 묘정에 배향됐고 강릉의 신석서원, 종성의 종산서원, 무산의 향사 등에 제향됐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월간서예』(미술문화원,2010.12),147-149쪽.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