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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조

이조년의 ‘이화에 월백하고…’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12. 4. 11.

 이조년의 ‘이화에 월백하고…’

 

 

 

* 석야, 신 웅 순(시조시인․평론가․서예가, 중부대교수)

 

   1306년 충렬왕은 충선왕의 환국을 저지하고 충선왕을 폐하기 위해 원나라에 갔다. 당시 원나라는 왕권 다툼에 여념이 없었다. 충렬왕의 셋째 아들, 충선왕은 왕권을 되찾기 위해 거기에서 나름대로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충선왕이 지지하고 있던 원나라 무종이 차기왕으로 유력시 되자 충선왕을 폐하기 위해 갔던 충렬왕은 외려 충선왕에 의해 왕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1308년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이조년은 이 때 비서승으로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던 인물이다. 그는 어느 편에 서지 도 않고 충렬왕을 성실히 보필했다. 그러나 부자간의 왕권 타툼으로 인해 유배길에 올라야했다. 유배 후 13년 간 고향에 은거했으나 한번도 자신의 무죄를 왕께 호소하지 않았다.

   충숙왕은 3년 간이나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다. 심양왕 왕고가 왕위 찬탈을 음모하자 이조년은 홀로 원나라에 들어가 원조정에다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이를 저지시켰다.

  충혜왕은 패륜이였다. 부왕의 후비, 수비 권씨와 숙공휘령공주를 잇달아 강간했다. 수비 권씨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죽었고 숙공휘령공주는 이 사실을 원왕실에 알렸다. 이 사건은 훗날 충혜왕의 폐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충혜왕의 패륜과 학정은 계속되었고 악행을 보고 받은 원나라 순제는 그를 압송하여 게양현으로 유배시켰다.

   “ 그대 왕정은 남의 윗사람으로서 백성들의 고혈을 긁어 먹은 것이 너무 심하였으니 비록 그대의 피를 온 천하의 개에게 먹인다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내가 사람 죽이기를 즐겨하지 않기 때문에 게양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니 그대는 나를 원망하지 말라.”.”(박영규,『고려왕조실록』(웅진 지식하우스,1996),466쪽)

   그는 귀양 가던 도중 죽었다.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슬퍼하기는 커녕 기뻐서 날뛰기까지 했다고 한다.

   원나라에서 이조년이 숙위할 때의 일이다. 충혜왕은 하루 하루 방탕한 생활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조년은 왕께 간곡한 경계의 말을 올리자 왕은 담을 넘어 도망을 쳤다고 한다. 이조년은 이렇게 충직한 신하였다. 여러 번 충혜왕의 학정을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치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조년(1269년, 원종 10-1343년, 충혜왕 복위 4)은 고려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경산, 자는 원로이다. 호는 매운당 혹은 백화헌, 시호는 문열이다. 1294년(충렬왕 20) 항공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안남서기에 보직되고 예빈내급사를 거쳐 지협주사․비서랑 등을 지냈다.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하자 장령이 되었고 그 뒤 여러번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를 내왕했다. 1339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그 이듬해 정당문학에 승진하였고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뜻이 확고하고 할 말은 하는 강직한 성격이었으며 이런 성품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많은 배척을 받기도 했다. 역임한 관직에 많은 명성과 공적이 있었으며 공민왕 때 성산군에 추증되었고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조 1수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널리 애송되고 있는, 고려 시조 중 최고의 걸작, 다정가이다.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달빛은 하얗게 부서지는데 밤은 깊어 은하수는 기운 삼경이라, 한가닥 춘심을, 고요를 깨뜨리는 소쩍새는 이를 알기라도 할까. 다정 다감한 내 마음도 병인듯하여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겠구나. 흐드러진 배꽃과 부서지는 달빛, 그리고 소쩍소쩍 우는 자규의 울음 소리. 시각과 청각이 기막히게 어우러져 아름다운 정서를 자아내고 있다. 절창 중의 절창이다.

   이 시조는 충혜왕에 대한 이조년의 지극한 충성심의 발로에서 나온 것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우의법을 써서 이 시조를 지었다고 한다. 우수에 빠져 있는 매운당 자신은 청초 결백한 배꽃의 모습에, ‘은한이 삼경’은 왕을 둘러싼 간신배들이 날뛰는 궁궐에 비유했으며, 일지춘심은 고향에서 충혜왕에 대한 충성심을, 자규는 바로 왕을 비유했다..”(류연석,『시조와가사의해석』(역락,2006),26쪽)

   정치와 사회가 문란했던 당시 고향으로 물러나 나라를 생각했을 만년의 심경을 읊은 것이리라. 정치를 떠나 은거한 그였기에 생각도 많고 회한도 많았으리라. 일지춘심을 그 누가 알까. 소쩍새라도 알기나 할까.

   이 시조의 한역시가 신위의 『경수당전고』「소악부」에 전하고 있다.

 

梨花月白三更天

啼血聲聲怨杜鵑

儘覺多情原是病

不關人事不成眠

 

   고려가 급속도로 원나라 속국으로 전락하고 있었던 당시 충렬․충선․충숙․충혜왕 4대에 걸쳐 왕을 보필했던 직간신의 이조년은 참으로 한평생을 착찹하고도 회한에 찬 삶을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다가올 고려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뛰어난 대학자였음에도 다정가 한 수로 그의 시재를 전부 헤아릴 수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외에 한 시 한 수와 편지글이 전하고 있다.

 

-『창조문학』(창조문학사,2011,가을호),215-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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