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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조

이항복의 ‘철령 높은 봉에…’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12. 4. 12.

이항복의 ‘철령 높은 봉에…’

 

 

 

 

 

 

                                        *석야, 신 웅 순(시조시인 ․ 평론가 ․ 서예가, 중부대교수)

 

 

   1613년 7월 광해군은 영창 대군을 폐서인, 강화도로 유배시켰다. 1614년(광해군 6년)에는 이이첨이 강화부사 정항에게 영창 대군 살해 지령을 내렸다. 처음에는 굶기다가 막판에 방에 불을 지폈다. 영창대군은 ‘어머니, 어머니’하고 부르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9세였다.

   인목대비 친정 아버지, 김제남도 사사되었고, 아들 영창대군도 살해되었다. 이제는 왕후 인목대비였다. 1614년 인목대비의 폐서인 논의가 있었다. 이항복은 이를 극력 반대했다. 백사는 삭탈 관직, 인목대비는 폐위되었다. 1618년 이항복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60세의 노구를 끌고 유배길에 올랐다.

오봉 이호민이 송별시 한 수로 백사를 전별했다.

 

 

이 땅에서 해마다 손을 전송하니

산단에 술잔을 들어 강리를 제수로 제사했는데

내 걸음이 가장 늦어 어느 곳에 갈 것인지

다시는 친구가 와서 작별할 이 없겠구나

 

 

此地年年送客歸

山壇擧酒祭江離

吾行最晩當何處

無復故人來別離

 

 

백사가 이에 화답했다.

 

 

구름낀 해가 쓸쓸해서 대낮이 어두운데

북풍은 멀리 떠나는 옷자락을 찢는구나

요동 성곽은 응당 옛날과 같겠지만

다만 영위는 가서 돌아오지 못할까 염려로세

 

 

雲日蕭蕭晝晦微

北風吹裂遠征衣

遼東城郭應依舊

只恐令威去不歸

 

 

   길을 떠날 때 돌아오지 못할 것을 헤아려 백사는 가족들에게 염습할 제구를 가지고 뒤따르게 했다.

   철령에서 그는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 원루를 비 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 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철령은 강원도 회양에서 함경도 안변으로 넘어가는 높은 재이다. 고신원루는 외로운 신하의 억울한 눈물이다. 구중심처는 아홉겹으로 둘러쌓인 깊고 깊은 곳을 말한다. 철령 봉우리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외로운 신하의 눈물을 비 삼아 뛰워다가, 님께신 구궁심처에 뿌려본들 어떻겠느냐. 이 비통한 마음을 알아달라는 신하의 눈물겨운 시조이다.

이 노래가 곧 서울, 궁중에까지 퍼졌다.

   하루는 후원에서 잔치를 열었다. 광해군이 이 노래를 들었다.

“ 누가 지은 것이냐? ”

   궁녀가 사실대로 대답했다.

   광해군은 추연히 눈물을 흘리고 잔치를 파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만고의 충신 백사였으나 권신들 때문에 끝내 불러오지 못했다. 백사와 광해군은 임란 때 분조(分朝)에서 함께 동고 동락한 적이 있었다. 해학과 기지로 일생을 풍미했던 오성대감은 배소에서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항복(1556,명종 11- 1618 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자는 자상, 호는 필운, 백사이다.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권율 장군의 사위이다. 죽마고우인 이덕형과의 기지와 작희에 얽힌 이야기로 더욱 알려진 인물이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한번은 이항복이 새저고리를 입었는데 떨어진 옷을 입은 아이가 보고 부러워하여 새저고리에 신었던 신까지 벗어주었다.

“ 새 저고리를 어찌 두고 맨발로 돌아왔느냐?”

어머니는 짐짓 노하여 꾸짖었다.

“ 그 아이가 부러워하는데 차마 아니주지 못하였습니다.”

   이항복은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의로웠다.

   소년 시절에 부랑배로 헛되이 세월을 보낸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준열하게 이를 책망했다. 백사는 이후 몸을 고쳐 학업에 열중했다.

   선조 13년(1580)에 알성 문과에 급제, 승무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583년 대제학 이이의 천거로 이덕형과 함께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우승지를 거쳐 호조참의가 되었다. 정여립 모반 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 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이듬해 정철의 논죄를 태만히 하였다하여 파면되었으나 곧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1592년 임진 왜란 때 왕비를 개성까지 호위했고,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송했다.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 군비를 정비했고 41세에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다. 영창대군의 사사와 인목대비 폐모론에 극력 반대, 죽음으로 싸우다 그만 삭탈 관직,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이해 8월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그 뒤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세워 제향했고 1659년에는 화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이정구는 그를 평해 “그가 관작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이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 하여 그의 기품과 인격을 칭송하기도 했다.

   이순신 충절묘시문을 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이다. 저서에 『백사집』,『북천일기』,『사례훈몽』등이 있으며 『청구영언』,『해동가요』에 시조 3수가 전하고 있다.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다. 그런 사람이었다. 햇빛을 영원히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잠시 구름이 가릴 뿐이다. 죽어서 비로소 산 사람이다.

 

『시조예술』(시조예술사, 2010 가을호), 124-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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