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언
1517(중종 12)∼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인·서예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
해객(海客). 주부인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형 사준(士俊), 아우 사기
(士奇)와 함께 글에 능하여 그 이름이 중국의 미산삼소(眉山三蘇)에
견주어졌다. 아들 만고(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양사언은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함흥·평창·강릉·회양·안변·철원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자연
을 즐겨 회양 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감상하였
으며,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
천)’이라 새겨진 그의 글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 군수로 있을 때는 선정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
를 받았고, 북변의 병란을 미리 예측하고 마초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
함에 대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릉(智陵)에 일어난 화재의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로 귀양갔다가 2년 뒤 풀려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양사언은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
게 재산을 남기지도 아니하였다. 그의 글씨는 해서와 초서에 능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濠)와 함께 조선 전기 4대서
가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 한시는 작위성이 없고
자연스러워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평을 받았다. 가사(歌辭)에
어떤 여인의 아름다움을 읊은 〈미인별곡 美人別曲〉과 을묘왜란 때
남정군(南征軍)을 따라 전쟁터에 나갔다가 지은 〈남정가 南征歌〉
가 있다. 이밖에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
더라.”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한편, 그는 남사고(南師古)에게서 역술(易術)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
확히 예언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문집으로 ≪봉래집 蓬萊集≫이
있고, 그가 지은 〈미인별곡〉과 허강(許艮)이 지은 〈서호별곡 西
湖別曲〉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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