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4 (태조 3) |
8월13일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종묘 지을 터를 봄 |
1394 (태조 3) |
11월10일 태조, 용산강에 거둥하여 종묘의 재목을 살펴봄 |
1394 (태조 3) |
12월 4일 최원을 종묘를 세우려는 터에 보내 오방지신(五方祗神)에게 제사지내고 그 터를 개척하게 함 |
1395 (태조 4) |
9월29일 대묘와 새 궁궐이 준공됨 |
1395 (태조 4) |
윤9월26일 권근을 개성유후사에 보내어 신위의 이안(移安)을 옛 종묘에 고유하고 목왕과 효비, 익왕과 정비, 도왕과 경비, 환왕과 의비의 4대 신주를 봉안함 |
1395 (태조 4) |
윤9월28일 백관이 반송정에 나아가 신주를 봉영하여 한양 새 종묘에 안치하고, 권중화가 이안제(移安祭)를 행함 |
1395 (태조 4) |
10월 5일 임금이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아가 친히 작헌례(酌獻禮) 거함 |
1398 (태조 7) |
2월29일 이근의 감독으로 종묘 남쪽에 가산(假山)을 쌓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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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 (태종 6) |
2월20일 이직, 이숙번 등에게 명하여 종묘의 재궁(齋宮)을 감독해서 짓게 함 |
1409 (태종 9) |
3월 2일 종묘의 남쪽에 가산(假山)을 증축함 |
1410 (태종10) |
4월 1일 종묘에 비와 눈을 가릴 곳을 지을 것을 상고하게 함 |
1410 (태종10) |
5월13일 비를 피할 데를 지을 곳을 살펴보고, 종묘에 동·서상(東西廂)을 짓는 것의 편부 와 공신 배향전을 지을 때의 여부를 의논케 함 |
1410 (태종10) |
5월26일 종묘 동·서상을 짓고, 공신당을 종묘 담안 동계(東階) 아래로 옮김 |
1410 (태종10) |
7월26일 태조와 비 신의왕후의 신주를 종묘 제5실에 부제(?祭)함 |
1413 (태종13) |
1월21일 종묘, 궐문의 입구에 ‘대소 관리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표말(標木)을 세움 |
1416 (태종16) |
7월27일 종묘의 제기고(祭器庫)와 재생방(宰牲房)을 지음 |
1416 (태종16) |
9월28일 창덕궁 동남 협문으로부터 종묘 북쪽 담으로 통하는 세자전 서쪽 문에 담을 쌓음. 왕이 종묘에 왕래하기 편리하게, 그리고 행차 도중 성래(盛禮)를 갖추는 번거로움 을 피하기 위함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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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 (태종17) |
1월 9일 종묘의 북장(北墻)에다 작은 문을 만들어 창덕궁과 직접 통하게 함 |
1421 (세종 3) |
8월 3일 종묘 안이 좁아서 종묘 확장을 상왕과 상의함 |
1421 (세종 3) |
8월 5일 예조, 중국 전례에 비추어 종묘의 규모에 대한 소문을 올림. 별묘(別廟)에는 정전 네 칸을 세우고, 동·서로 각각 협실 한 칸씩을 짓고, 그 나머지 담이나 섬돌 같은 것은 종묘와 같게 함 |
1421 (세종 3) |
10월 9일 영녕전이 낙성됨 |
1421 (세종 3) |
12월16일 공정대왕의 신주를 합사(合祀)하기 위하여 목조의 신주를 영녕전 제1실로 옮기고, 익조를 종묘의 제1실로 올리고, 도조이하 신주 차례로 체천(遞遷) |
1423 (세종 5) |
12월 5일 태종 공정대왕을 부묘(?廟)함에 있어 같은 대에도 실을 달리하는(同世異室) 옛날제도에 따라 공정대왕의 동쪽 방 한 칸을 수리하여 봉안함 |
1432 (세종13) |
4월 3일 종묘에 소나무가 없으면 화재가 없을 것이므로, 종묘 담 안의 소나무를 솎아서 베기로함 |
1434 (세종16) |
10월 2일 처음으로 앙부일구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여 일영(日影)을 관측 |
1472 (성종 3) |
1월12일 환조의 신주와 의혜왕후의 신주를 영녕전에 이안하고, 예종의 신주와 장순왕후 의 신주를 태실(太室)에 승부(陞?)함 |
1483 (성종14) |
1월27일 김수광이 종묘를 옮기는 것에 대하여 아룀. 종묘 재실이 몹시 비좁으며, 또 담 밖 에 인가가 매우 가까이 닿아 있어서, 화재 방지를 위하여 가까이 있는 민가는 철거 시키도록 청함 |
1496 (연산 2) |
1월19일 묘제(廟制)에 대한 의논을 승정원에 내리고서 공정왕의 신주를 영녕전 익실에 봉안하고, 문종 신주를 종묘 익실에 봉안하도록 함 |
1496 (연산 2) |
1월20일 증경 정승 등에게 묘제를 의논하게 함. 성종을 부묘하게 되면서 4대를 넘지 않은 신위들이 기존 7실에 다 차있게 되어 종묘 증축에 관한 두 가지 안이 제시되었는 데, 결국 문종의 신주를 종묘 익실에 봉안하고, 정종의 신주를 영녕전 익실에 봉안하는 안을 받아드려 증축 논의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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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 (연산11) |
11월18일 종묘의 세 면에 있는 인가를 철거하게 하고, 동으로는 연지(蓮池)의 예전 큰 길까지, 서로는 창덕궁 동행랑(東行廊)까지, 남으로는 큰길까지 한계를 철거하고 담을 쌓아라고 함 |
1511 (중종 6) |
5월 8일 종묘의 담 밖 인가에서 화재가 나서 연소된 것이 67구나 되었으며, 담 안 소나무에까지 번짐 |
1511 (중종 6) |
5월10일 종묘 담 밑은 인가가 밀접하여 종묘에 화가 적지 않으므로 그 터를 측량해서 불탄 가옥은 30자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관에서 공지(空地)와 재목, 기와를 주어서 옮겨 짓게 함 |
1546 (명종 1) |
3월22일 대신들과 대왕 대비전에 존호를 알리는 일과 중종의 부묘에 대해 논의함. 중종 대왕을 부묘할 시기가 임박하였는데, 종묘에는 조천할 신위가 없고 또 공실 (空室)도 없어서 부득이 새로 더 지어야만 부묘할 수 있고, 더 짓는다면 종묘 동쪽에 다 세칸을 지어야 할 것이라고 함 |
1546 (명종 1) |
9월17일 예조가 새로 지은 종묘의 사실(四室)로 들어간 문종의 신위를 고치는 것에 대해 아룀. 정전 네칸을 증건하여 열한 칸이 이룩됨 |
1569 (선조 2) |
4월 5일 선왕 명종의 부묘가 임박하여 대신들이 종묘는 본시 열한 칸으로 열 실은 이미 차있고 한 칸이 비어 허실(虛室)로 있으니 명종을 빈 칸에 부묘하는 일과 상위를 체천하는 일에 대하여 의논함 |
1592 (선조25) |
4월13일 왜군 조선침략, 임진왜란 발발함 |
1592 (선조25) |
5월 1일 왜군이 종묘를 불태움. 임금이 개성에 머문지 이틀 만에 서로(西路)로 출발 하여 금교역(金郊驛)에 머물렀는데, 당시 종묘·사직의 위패를 개성의 목청전(穆淸展) 에 봉안했다가 그대로 묻게 하였음 |
1592 (선조25) |
5월10일 종묘사직의 신주를 개성에서 받들고 와서 영숭전(永崇展) 좌우협실(左右夾 室)에 봉인함 |
1592 (선조25) |
6월 1일 세자에게 종묘·사직을 받들고 분조(分朝)하도록 명함 |
1592 (선조25) |
8월 1일 세자에게 임시로 종묘 사직을 받들게 함 |
1593 (선조26) |
10월 1일 왕이 도성에 다시 돌아옴. 정능동(貞陵洞)의 옛 월산대군 집을 행궁(行宮) 으로 삼고, 영의정 심연원의 집을 임시 종묘로 삼음 |
1593 (선조26) |
10월 2일 도성 사람들이 수습해 놓은 잃어버린 종묘의 옥책(玉冊)약간을 옮겨다 종묘 에 간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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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 (선조38) |
12월15일 영건길년(營建吉年)인 무신년 중 우선 종묘를 시작하여 상량(上樑)케 함 |
1607 (선조40) |
4월 22일 종묘 제도에 의견이 분분하니 전일(前日)의 제도에 따라 중수함 |
1608 (광해卽) |
5월30일 종묘를 중건하여 낙성함. 정전은 명종 때 규모인 열한 칸으로, 영녕전은 정전 네 칸, 좌우 협실 각 세 칸, 모두 열 칸의 규모로 중건됨 |
1608 (광해卽) |
6월29일 태묘와 영녕전의 신주를 옮겨 봉안하는 예를 마침 |
1610 (광해 2) |
3월 21일 공정 대왕과 문종은 영녕전의 동쪽 협실에서 서쪽 협실로 옮기는 조천 하는 일로 예조가 건의하니 허가함 |
1610 (광해 2) |
4월10일 예종과 덕종의 묘주(廟主)를 영녕전으로 체천함 |
1627 (인조 5) |
1월13일 후금(後金), 조선 침입, 정묘호란 발발함 |
1627 (인조 5) |
1월19일 종묘·사직의 신주와 자전과 중궁을 받들고 강도(江都)로 파천(播遷)할 것을 하교. |
1635 (인조13) |
3월 6일 성종의 세실을 백세토록 조천하지 않도록 결정함 |
1636 (인조14) |
12월10일 청군 침입, 병자호란 시작함 |
1636 (인조14) |
12월14일 파천하는 의논을 정하고 종묘·사직의 신주와 빈궁을 받들고 강도로 향함 |
1637 (인조15) |
2월 4일 영중추부사 윤방이 강도에서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오니 시민당(時敏 堂)에 봉안하도록 함 |
1637 (인조15) |
5월 6일 열성 신주를 태묘에 봉안하고 친제(親祭)를 행함 |
1651 (효종 2) |
7월 7일 인조와 인열왕후의 부묘례를 행함 |
1661 (현종 2) |
7월 5일 효종을 부묘하기 위해 인종·명종의 신주를 영녕전에 조천(?遷)함 |
1661 (현종 2) |
7월 7일 효종을 종묘 제10실에 부묘함 |
1663 (현종 4) |
4월 3일 영녕전 개수 문제를 논의함. 좌우의 익실을 철거한 뒤에 본전(本殿)의 제도 대로 동서에 각각 세 칸씩 덧붙여 모두 열 칸을 만들고서, 서쪽을 상으로 하여 사조 (四祖) 이하를 차례로 봉안하도록 함 |
1667 (현종 8) |
7월 4일 영녕전을 중건하는 역사가 끝남. 동서 익실 각 네 칸을 증축하여, 정전 네 칸과 함께 모두 열두 칸이 됨 |
1669 (현종10) |
10월 1일 선덕왕후를 태묘에 부묘함 |
1676 (숙종 2) |
7월17일 선조(宣祖)를 세실(世室)에 모시는 일을 종묘와 영녕전에 고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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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6 (영조 2) |
1월11일 종묘를 세 칸을 증건하면 음의 수인 열네 칸이 되므로 한 칸을 더 늘려 양의 수인 열다섯 칸으로 하기로 함 |
1726 (영조 2) |
3월19일 종묘 정전 증건. 필역(畢役)함. 네 칸을 증건하여 모두 15칸으로 됨. 태실 서편은 그대로 두고 동편으로 증건함에 따라 동편의 협실, 동월랑, 신문, 동문, 수복 방 등은 모두 동편으로 옮겨 다시 지음 |
1747 (영조23) |
1월 26일 태묘에는 모든 무늬가 없는 명주 종류를 쓰도록 명함 |
1755 (영조31) |
4월 26일 종묘의 서직(黍稷)을 담는 숟가락을 개조하도록 명함. 종묘 수저가 작아서 스기에 합당하지 않아, 이 때에 이르러 주걱을 버리고 수저를 사용하라 명하여 밥을 뜨기에 알맞게 함 |
1767 (영조43) |
1월15일 태묘에 술을 쓰는 일을 여러 신하에게 묻고 술을 쓰게 함 |
1778 (정조 2) |
2월 6일 종묘의 공신당을 증축함 |
1778 (정조 2) |
5월 2일 영종과 정성왕후를 13실에, 진종과 효순왕후를 14실에 제부함 |
1782 (정조 6) |
11월27일 영종을 높에 세실로 삼고 영종의 신주를 옮기지 말 것을 명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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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 (순조 2) |
8월 9일 정종을 태묘 제15실에 올려 부묘함. 종묘 영녕전의 합사를 거행함 |
1836 (헌종 2) |
3월25일 종묘 정전 및 영녕전 증건 공사. 필역함. 정전은 네 칸을 증건하여 현재의 규모인 열아홉 칸으로, 영녕전은 동서 협실 각 두 칸을 증건하여 현재의 규모인 정전 네 칸, 동서 협실 각 여섯 칸으로 됨 |
1837 (헌종 3) |
1월 7일 순종과 익종을 태묘 16실과 17실에 올려서 부묘함 |
1889 (고종26) |
12월5일 영종묘호를 영조로 개정함. |
1899 (광무 3) |
12월 7일 사도세자의 묘호를 장조로 함. |
1899 (광무 3) |
12월17일 대한제국의 예법에 따라 태조등 종묘 신위의 제호(題號)를 고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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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융희 2) |
이 해부터 향사리정령에 의하여 종묘 정전 납향일 제사가 폐지됨 |
1921년 |
2월 22일 고종황제, 명성황후의 부묘식을 거행함. 장조와 비경의황후의 신위를 영녕전 제15실로 옮김 |
1926년 |
3월 16일 순종의 승하를 종묘와 영녕전에 고함 |
1939년 |
이 해부터 종묘 제삿날을 양력으로 바꾸어 3, 6, 9, 12월 상순에 각각 지냄 |
1945년 |
이 해부터 종묘제례가 폐지됨 |
1963년 |
1월 18일 종묘, 사적(125호)으로 지정됨 |
1964년 |
12월 7일 종묘제례악, 중요무형문화재(1호)로 지정됨 |
1969년 |
이 해부터 종묘제례를 매년 1회 올리기 시작함 |
1971년 |
이 해부터 전주이씨대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종묘대제를 봉행함 |
1975년 |
5월 3일 종묘제례, 중요무형문화재(56호)로 지정됨 |
1983년 |
11월11일 서울특별시, 종묘 어정(御井)을 유형문화재(56호)로 지정함 |
1985년 |
1월 8일 정전 국보(227호)로 지정됨. 영녕전 보물(821호)로 지정됨 |
1995년 |
12월 9일 종묘,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19차 정기총회의 의결을 거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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