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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향 정광옥 한글서예가
  • 목향 정광옥 서예가
한시(한문)

한용운선생의 시모음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19. 8. 4.

禪 詩

▣ 목 차 ▣

<1>추운 계절에 옷이 없어 (歲寒衣不到戲作)// <2>새로 갬(新晴)//

<3>차가운 비가 내리는 연말(暮歲寒雨有感)// <4>수행자(雲水)//

<5>홀로 읊다(獨唫)// <6>상큼한 추위(淸寒)// <7>여행 중의 회포(旅懷)//

<8>즐거움(自樂)// <9>홀로 거닐며(孤遊)// <10>병들어 시름하며(病愁)//

<11>뜻 맞는 벗과 함께(與映湖和尙訪乳雲和尙乘夜同歸)//

<12>영호 화상의 시에 부쳐(次映湖和尙)//

<13>병든 벗을 생각하며(乳雲和尙病臥甚悶又添鄕愁)//

<14>고향 생각(思鄕)// <15>백화암을 찾아서(訪白華庵)//

<16>고기잡이의 뱃노래(巴陵漁父棹歌)// <17>송청암에게(贈宋淸巖)//

<18>학명 선사에게(養眞庵臨發贈鶴鳴禪伯)// <19>양진암 풍경(養眞庵)//

<20>이별의 시(贈別)// <21>어느 학생에게(寄學生)//

<22>비온 뒤의 범어사(梵魚寺雨後述懷)// <23>병을 앓고 나서(仙巖寺病後作)//

<24>어느 일본 절의 추억(曺洞宗大學校別院)// <25>옛 뜻(古意)//

<26>매미 소리를 듣고(東京旅館聽蟬)// <27>가을 비(秋雨)//

<28>가을 새벽(秋曉)// <29>향로암(香爐庵卽事)// <30>다듬이 소리(砧聲)//

<31>높은 데 올라서(登高)// <32>달밤(玩月)// <33>달을 보고(見月)//

<34>달이 돋으려 할 때(月欲生)// <35>달이 처음 뜰 때(月初生)//

<36>달이 한가운데 올라(月方中)// <37>달이 지려 할 때(月欲落)//

<38>등 그림자(咏燈影)// <39>병상에서(病監後園)// <40>기러기(咏雁)//

<41>벚꽃(見櫻花有感)// <42>빗속에 홀로 노래하다.(雨中獨唫)//

<43>회포를 읊음(懷唫)// <44>영산포의 배 안에서(榮山浦舟中)//

<45>구암폭포(龜巖瀑)// <46>매화 예찬(又古人梅題下不作五古余有好奇心試唫)//

<47>한가함咏閑// <48>한가한 노래(閑唫)// <49>번민(自悶)// <50>새벽(曉日)//

<51>새벽 경치(曉景)// <52>청정한 노래(淸唫)// <53>눈 내린 새벽(雪曉)//

<54>동지冬至// <55>본 대로 느낀 대로(1)(卽事)//

<56> 본 대로 느낀 대로(2)(卽事)// <57>본 대로 느낀 대로(3)卽事//

<58>본 대로 느낀 대로(4)(卽事)// <59>본 대로 느낀 대로(5)(卽事)//

<60>무제(1)(無題)//<61>무제(2)(無題)// <62>홀로 있는 밤(獨夜 二首)//

<63>구곡령을 지나며(過九曲嶺)// <64>규방의 한(春閨怨)//

<65>한가히 노닐며(閒遊)// <66>나비(蝴蝶)// <67>매화 꽃잎(觀落梅有感)//

<68>봄꿈(春夢)// <69>번민을 풀다(遣悶)// <70>산골집 흥취(山家逸興)//

<71>개인 날(唫晴)// <72>산의 대낮(山晝)// <73>구암사의 초가을(龜岩寺初秋)//

<74>가을 밤비(秋夜雨)// <75>회포(述懷)// <76>선방 뒷뜰에 올라(登禪房後園)//

<77>9월 9일(重陽)// <78>들길을 걸으며(野行)//

<79>가을 밤에 빗소리를 듣고(秋夜聽雨有感)// <80>한강(漢江)//

<81>피리 소리 흐르는데(漁笛)// <82>먼 생각(遠思)//

<83>창가를 스치는 비바람(獨窓風雨)// <84>시 쓰는 버릇을 웃다(自笑詩癖)//

<85>옛 뜻(古意)// <86>산가의 새벽(山家曉日)//

<87>눈꽃(內院庵有牧丹樹古枝受雪如花因唫)//

<88>문틈 사이로 본 세월(備風雪閉內外戶窓黑痣看書戲作)//

<89>홀로 앉아(獨坐)// <90>눈 오는 밤 그림을 보고(雪夜看畵有感)//

<91>눈 그친 후에(雪後漫唫)// <92>추운 적막(寒寂)//

<93>의심이 씻은 듯 풀리다(悟道頌)// <94>피란 길(避亂途中滯雨有感)//

<95>옥중의 감회(獄中感懷)// <96>출정 군인 아내의 한(征婦怨)//

<97>가을 느낌(秋懷)// <98>눈 오는 밤(雪夜)//

<99>앵무새만도 못한 몸(一日與隣房通話爲看守窃聽雙手被輕縛二分間卽唫)//

<100>안중근 의사를 기림(安海州)// <101>매천 황현을 기림(黃梅泉)//

<102>맑은 새벽(淸曉)// <103>영호 화상(贈映湖和尙述未嘗見)//

<104>오세암에서 쓰는 편지(自京歸五歲庵贈朴漢永)//

<105>도반을 기리는 노래(1)(京城逢映湖錦峯兩伯同唫)//

<106>도반을 기리는 노래(2)(與映湖乳雲兩伯夜唫)//

<107>도반을 기리는 노래(3)(釋王寺逢映湖乳雲兩和尙作)//

<108>도반을 기리는 노래(4)(與映湖錦峯兩伯作(在宗務院))//

<109>금봉 선사(與錦峯伯夜唫)// <110>옛 벗에게 주는 글(贈古友禪話)//

<111>완호 학사와 헤어지며(別玩豪學士)//

<112>선비의 죽음을 조상함(代萬化和尙挽林鄕長)//

<113>구암사에서 본 풍경(龜巖寺與宋淸巖兄弟共唫)//

<114>지광 선사에게 답함(和智光伯(遺以詩文故答))//

<115>아사다 교수에게 답함(和淺田敎授(淺田斧山遺以參禪詩故以此答))//

<116>남형우에게 주는 시(贈南亨祐)//

<117>계초 선생(謹賀啓礎先生晬辰)// <118>영호화상의 시에 부쳐(次映湖和尙)//

<119>매천의 시에 부쳐(留仙岩寺次梅泉韻)//

<120>매화를 노래함(讀雅頌朱子用東坡韻賦梅花用其韻賦梅花)//

<121>화엄사 산보(華嚴寺散步)// <122>오세암(五歲庵)// <122>증상사(增上寺)//

<123>약사암 가는 길(藥師庵途中)// <124>양진암의 봄(養眞庵餞春)//

<125>향로암 야경(香爐庵夜唫)// <126>쌍계루(雙溪樓)//

<127>향적봉 풍경(次映湖和尙香積韻)//<128>고향 생각(思鄕)//

<129>비오는 날의 고향 생각(思夜聽雨)// <130>고향을 생각하는 괴로움(思鄕苦)//

<131>닛코로 가는 길(日光道中)// <132>닛코의 호수(日光南湖)//

<133>미야지마의 배 안에서(宮島舟中)// <134>시모노세키의 배 안에서(馬關舟中)//

<135>병든 봄(病唫)// <136>회갑날의 즉흥(周甲日卽興(一九三九. 七. 十二日於淸凉寺))//

<137>신문이 폐간되다(新聞廢刊)

 

<1>

 

추운 계절에 옷이 없어

歲寒衣不到戲作

 

 

해는 바뀌어도 옷은 안 오니

몸 하나도 주체하기 어려운 줄 비로소 알았네.

이런 마음 아는 이 많지 않거니

범숙은 요사이 그 어떠한지.

歲新無舊着

自覺一身多

少人知此意

范叔近如何

 

 

 

 

<2>

 

새로 갬

新晴

 

 

새 소리 꿈 저쪽에 차고

꽃 내음은 선(禪)에 들어와 스러진다.

선과 꿈 다시 잊은 곳

창 앞의 한 그루 벽오동나무!

禽聲隔夢冷

花氣入禪無

禪夢復相忘

窓前一碧梧

 

<3>

 

 

차가운 비가 내리는 연말

暮歲寒雨有感

 

 

차가운 비 하늘 가를 스치고 지나는데

희어진 귀밑머리 해가 저물고……

나날이 자라는 시름 키보다 높아

온몸에 당기는 것 오직 술뿐!

날씨는 차가운데 술은 안 오고

돌아가 이소(離騷)를 읽고 있자니

사람들은 왜 못 마땅히 여기는지

계율을 안 지킨다 나를 탓하네.

눈을 둘러 인간 세계 내려다보면

땅이란 땅 바다로 또 바뀌느니!

寒雨過天末

鬢邊暮歲生

愁高百骸低

全身但酒情

歲寒酒不到

歸讀離騷經

傍人亦何怪

罪我違淨行

縱目觀下界

盡地又滄溟

 

<4>

 

수행자

雲水

 

 

흰 구름은 끊어져 법의(法衣)와 같고

푸른 물은 활보다도 더욱 짧아라.

이곳 떠나 어디로 자꾸 감이랴.

유연히 그 무궁함 바라보느니!

白雲斷似衲

綠水矮於弓

此外一何去

悠然看不窮

 

 

 

<5>

 

홀로 읊다

獨唫

 

 

산중은 차고 해도 기우는데

아득한 이 생각 누구와 함께 하랴.

잠시 이상하게 우는 새 있어서

한암고목(寒巖枯木)까지는 안 되고 마네.

山寒天亦盡

渺渺與誰同

乍有奇鳴鳥

枯禪全未空

 

 

<6>

 

상큼한 추위

淸寒

 

달을 기다리며 매화는 학인 양 야위고

오동에 의지하니 사람 또한 봉황임을!

온 밤내 추위는 안 그치고

눈은 산을 이루네.

待月梅何鶴

依梧人亦鳳

通宵寒不盡

遶屋雪爲峰

 

 

 

 

 

 

<7>

 

여행 중의 회포

旅懷

 

한 해가 다 가도록 돌아가지 못한 몸은

봄이 되자 다시 먼 곳을 떠돈다.

꽃을 보고 무심하지는 못해

좋은 곳 있으면 들러서 가곤 한다.

竟歲未歸家

逢春爲遠客

看花不可空

山下奇幽跡

 

<8>

 

즐거움

自樂

 

철이 마침 좋은지라 막걸리 기울이고

이 좋은 밤 시 한 수 없을 수 있는가.

나와 세상 아울러 잊었어도

계절은 저절로 돌고 도느니.

佳辰傾白酒

良夜賦新詩

身世兩忘去

人間自四時

 

 

 

<9>

 

 

홀로 거닐며

孤遊

 

일생에 기구한 일 많이 겪으니

이 심경은 천추(千秋)에 아마 같으리.

일편단심 안 가시니 밤달이 차고

흰머리 흩날릴 제 새벽 구름 스러짐을.

고국 강산 그 밖에 내가 섰는데

아, 봄은 이 천지에 오고 있는가.

기러기 비껴 날고 북두성 사라질 녘

눈서리 치는 변경 강물 흐름을 본다.

一生多歷落

此意千秋同

丹心夜月冷

蒼髮曉雲空

人立江山外

春來天地中

雁橫北斗没

霜雪關河通

 

반평생 만나니 기구한 일들.

다시 북녘땅 끝까지 외로이 흘러왔네.

차가운 방 안에서 비바람 걱정하느니

이 밤 새면 백발 느는 가을이리라.

半生遇歷落

窮北寂료(빌 료 ․ 宀+翏)遊

冷齋說風雨

晝回鬢髮秋

 

*참고=‘빌 료’ 한자가 컴퓨터에 없음 翏(높이날 료)에 宀(갓머리)가 있는 한자입니다.

 

 

<10>

 

 

병들어 시름하며

病愁

 

푸른 산 그 품속에 오두막집 한 채 있어

젊은 몸 어이하여 병은 이리 많은 건지.

시름이 끝없는 대낮

가을꽃도 피누나.

靑山一白屋

人少病何多

浩愁不可極

白日生秋花

 

 

 

 

 

 

<11>

 

 

뜻 맞는 벗과 함께

與映湖和尙訪乳雲和尙乘夜同歸

 

만나니 우리들 뜻이 맞아서

어느덧 해 저물고 밤이 되었네.

눈 속에 주고받은 심상한 말도

내 마음 비쳤었네 밝히 물처럼.

相見甚相愛

無端到夜來

等閑雪裡語

如水照靈臺

 

<12>

 

 

영호 화상의 시에 부쳐

次映湖和尙

 

 

시(詩)와 술 일삼으며 병이 많은 이 몸

문장을 벗하여서 그대도 늙어…….

눈바람 치는 날에 편지 받으니

가슴에 뭉클 맺히는 이 정!

詩酒人多病

文章客亦老

風雲來書字

兩情亂不少

 

 

 

 

 

 

<13>

 

 

병든 벗을 생각하며

乳雲和尙病臥甚悶又添鄕愁

 

 

친구는 이제 병들어 눕고

기러기 편에 편지도 없어……

이 시름 어찌 끝이 있으랴.

등불 밑에 시시로 늙어 가느니!

故人今臥病

春雁又無書

此愁何萬斛

燈下千鬢疎

 

<14>

 

 

고향 생각

思鄕

 

천리라 머나먼 고향을 떠나

글에 묻혀 떠돌기 설흔 해여라.

마음이야 젊어도 이미 늙어서

눈바람 속 하늘가에 다시 이르다.

江國一千里

文章三十年

心長髮已短

風雪到天邊

 

 

 

 

 

 

 

<15>

 

 

백화암을 찾아서

訪白華庵

 

 

그윽한 오솔길을 봄날에 찾아드니

굽은 숲을 따라 풍광(風光)이 새로워라.

길도 끊어진 여기 흥은 일어서

바라보며 마음껏 시를 읊조리다.

春日尋幽逕

風光散四林

窮途孤興發

一望極淸唫

 

<16>

 

 

고기잡이의 뱃노래

巴陵漁父棹歌

 

배가 가니 하늘은 물과 같은데

그 더욱 맑은 노래 들려 올 줄야!

가락은 달빛 속을 누벼 고요하고

소리는 밤의 적막 헤쳐 흐르네.

지음(知音)이 그 누군지 백로에 묻고

도롱이에 가득 싸인 고향 달리는 꿈.

다시 창랑(滄浪)의 노래 들려 오기에

관끈 어루만지며 옛 산천 그리느니……

舟行天似水

此外接淸歌

韻入月明寂

響飛夜靜多

知音問白鷺

歸夢滿晴蓑

更聽滄浪曲

撫纓憶舊波

 

<17>

 

 

송청암에게

贈宋淸巖

 

만나니 놀라운 중 반갑기도 반가와

함께 가을 산을 찾아들었네.

해 뜨면 구름의 흰 빛을 보고

밤에는 달빛 속을 거닐기도 하고.

돌멩이야 본래 말이 없어도

오래 된 오동에선 맑은 소리 나는 것.

이 세상이 곧 낙토(樂土)이거니

구태여 신선 되기 바라지 말게.

- 이때 송(宋)이 신선 되기를 원했다.

相逢輒驚喜

共作秋山行

日出看雲白

夜來步月明

小石本無語

古桐自有聲

大塊一樂土

不必求三淸

- 時宋求仙

 

<18>

 

 

학명 선사에게

養眞庵臨發贈鶴鳴禪伯

 

이 세상 밖에 천당은 없고

인간에게는 지옥도 있는 것.

백척간두에 서 있는 그뿐

왜 한 걸음 내딛지 않는가.

世外天堂少

人間地獄多

佇立竿頭勢

不進一步何

 

일에는 어려움 많고

사람 만나면 헤어져야 하는 것.

본래 세상 일은 이와 같거니

남아라면 얽매임 없이 뜻대로 살리.

臨事多艱劇

逢人足別離

世道固如此

男兒任所之

 

<19>

 

 

양진암 풍경

養眞庵

 

깊기도 깊은 별유천지라

고요하여 집도 없는 듯.

꽃이 지는데 사람은 꿈속 같고

옛 종(鍾)을 석양이 비춘다.

深深別有地

寂寂若無家

花落人如夢

古鍾白日斜

 

 

 

 

 

 

 

<20>

 

 

이별의 시

贈別

 

 

천하에서 만나기도 쉽지 않네만

옥중에서 헤어짐도 또한 기이해!

옛 맹세 아직도 식지 않았거든

국화와의 기약을 저버리지 말게.

天下逢未易

獄中別亦奇

養盟猶未冷

莫負黃花期

 

<21>

 

 

어느 학생에게

寄學生

 

 

치사스럽겐 살아도 치욕인데

옥으로 부서지면 죽어도 보람임을!

칼 들어 하늘 가린 가시나무를 베고

길이 휘파람 부니 달빛 밝구나.

瓦全生爲恥

玉碎死亦佳

滿天斬荊棘

長嘯月明多

 

 

 

 

 

 

<22>

 

비온 뒤의 범어사

梵魚寺雨後述懷

 

 

하늘 끝 흘러오니 봄비 가늘고

옛절에 매화의 꿈은 차갑다.

홀로 가며 천고(千古)를 생각하노니

구름 스러지고 머리는 희어……

天涯春雨薄

古寺梅花寒

孤往思千載

雲空髮已殘

 

<23>

 

병을 앓고 나서

仙巖寺病後作

 

 

흘러오니 남쪽 땅의 끝인데

앓다가 일어나니 어느덧 가을 바람……

매양 천리길을 혼자 가다가

길 막히면 도리어 흐뭇하더군.

客遊南地盡

病起秋風生

千里每孤往

窮途還有情

 

 

초가을 병 핑계로 사람 안 만나고

하얀 귀밑머리 늙음이 물결치네.

꿈은 괴로운데 친구는 멀고

더더욱 찬비 오니 어쩌겠는가.

初秋人謝病

蒼鬢歲生波

夢苦人相遠

不堪寒雨多

 

<24>

 

 

어느 일본 절의 추억

曺洞宗大學校別院

 

절은 고요하기 태고(太古) 같아서

세상과는 인연이 닿지 않는 곳.

종소리 끊인 뒤 나무들 그윽하고

차 향기 높은 사이 한가한 햇빛.

선심(禪心)은 맑아서 백옥인 양한데

꿈만 같이 이 청산 이르른 것을.

다시 별다른 곳 찾아 나섰다가

우연히 새로운 시 얻어서 돌아왔네.

一堂似太古

與世不相干

幽樹鍾聲後

閑花茶藹間

禪心如白玉

奇夢到靑山

更尋別處去

偶得新詩還

 

절에는 아름다운 나무가 많아

낮에도 음산하고 물결 떨어져 ……

깜빡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꽃이 지는데 경쇠 소리 높아라.

院裡多佳木

晝陰滴翠濤

幽人初破睡

花落磬聲高

 

 

 

<25>

 

옛 뜻

古意

 

맑은 밤에 칼 짚고 서니

칼날 앞에 천추(千秋)도 안중에 없네.

꽃이라 버들이라 상할까 하여

머리 돌려 봄바람 불러 오느니!

淸宵依劒立

霜雪千秋空

恐傷花柳意

回看迎春風

 

 

 

<26>

 

매미 소리를 듣고

東京旅館聽蟬

 

 

나무 빛은 푸르러 물보다 맑고

여기 저기 매미 소리 초가(楚歌) 울리듯.

이 밖의 다른 일은 말하지 말게.

나그네의 이 시름 돋울 뿐이니.

佳木淸於水

蟬聲似楚歌

莫論此外事

偏入客愁多

 

 

 

 

<27>

 

가을 비

秋雨

 

왜 이리도 쓸쓸한 가을비런가.

갑자기 으스스해 새삼 놀라는 것.

생각은 하늘 나는 학인 양하여

구름 따라 서울에 들어가느니.

秋雨何蕭瑟

微寒空自驚

有思如飛鶴

隨雲入帝京

 

 

<28>

 

가을 새벽

秋曉

 

 

빈 방안 어느덧 환해지고

은하 기울어 다락에 들어온다.

가을 바람 옛 꿈을 불고

새벽달은 내 시름을 비춘다.

낙엽진 나무 사이 등불 하나 뵈고

낡은 못으로 차가운 물이 흐른다.

안 돌아오는 나그네 생각하여

내일 아침이면 흰머리 되리라.

虛室何生白

星河傾入樓

秋風吹舊夢

曉月照新愁

落木孤燈見

古塘寒水流

遙憶未歸客

明朝應白頭

 

<29>

 

 

향로암

香爐庵卽事

 

 

중이 떠나가니 가을 산 멀고

백로 나는 곳 들물 맑아라.

나무 그늘 서늘한데 번지는 피리 소리.

다시는 신선을 그리워 안 하리.

僧去秋山逈

鷺飛野水明

樹凉一笛散

不復夢三淸

 

 

 

 

 

<30>

 

 

다듬이 소리

砧聲

 

 

그 어디서 들리는지 다듬이 소리

옥(獄)에 가득 추위를 몰고 오는 밤.

하늘 옷이 덥다고 이르지 말라.

뼈에 스미는 이 추위와 어떻다 하리.

何處砧聲至

滿獄自生寒

莫道天衣煖

孰如徹骨寒

 

<31>

 

 

높은 데 올라서

登高

 

 

조망을 즐기려 해 높은 뫼 올라가니

사람은 점 같아서 산 저쪽에 사라지고

소낙비 내리는 그 속 돛단배가 가누나.

장강을 가노라면 술 만나기 드물렷다.

펄펄 날리는 눈 시에 들어 녹는 것을!

오동에 바람은 세차고 낙일(落日) 머리 물들여……

偶思一極目

躋彼危岑東

人去靑山外

舟行白雨中

長河遇酒少

大雪入詩空

風落枯桐急

殘陽映髮紅

 

<32>

 

달밤

玩月

 

 

산에는 푸른 달빛 흘러 넘치느니

홀로 거닐며 마음껏 노니는 이 밤.

누구 위해 먼 먼 이 정(情)이러뇨.

밤은 깊어 가고 걷잡을 수 없어라.

空山多月色

孤往極淸游

情緖爲誰遠

夜闌杳不收

 

 

 

 

<33>

 

 

달을 보고

見月

 

 

숨어 산다고 달이야 안 보랴.

하룻밤 내내 뜬눈으로 새우네.

온갖 소리 끊어진 그 경지에서

또 다시 뚯이 있는 시를 찾느니!

幽人見月色

一夜總佳期

聊到無聲處

也尋有意詩

 

 

 

 

<34>

 

달이 돋으려 할 때

月欲生

 

 

뭇 별들이 햇빛을 앗아 먹으니

온갖 귀신 나타나 활개를 치고.

어둠의 장막 드리우는 곳

숲이란 숲 자취를 각기 감추네.

衆星方奪照

百鬼皆停遊

夜色漸墜地

千林各自收

 

 

 

 

<35>

 

 

달이 처음 뜰 때

月初生

 

 

묏등에 흰 구슬 불끈 솟으니

시내에는 황금 덩이 떠서 흐르네.

산골 사람 가난함을 한하지 말라.

하늘이 주는 보배 끝이 없거니!

蒼岡白玉出

碧澗黃金遊

山家貧莫恨

天寶不勝收

 

 

 

 

<36>

 

달이 한가운데 올라

月方中

 

 

온갖 나라 다 함께 우러러보고

모든 사람 제각기 즐기며 노네.

너무나 빛나기에 가질 수 없고

먼 하늘 걸렸거니 어찌 손대리.

萬國皆同觀

千人各自遊

皇皇不可取

迢迢那堪收

 

 

 

 

 

<37>

 

달이 지려 할 때

月欲落

 

 

소나무 아래 푸른 안개 스러지고

학이 잠든 언저리 노니는 맑은 꿈.

동산에서는 피리 소리 그치고

찬 달빛 걷히어 아쉽다.

松下蒼烟歇

鶴邊淸夢遊

山橫鼓角罷

寒色盡情收

 

 

<38>

 

 

등 그림자

咏燈影

 

 

밤은 차서 창문도 물과 같은 밤

등 그림자 바라보며 누워 있으니

두 눈으론 아무래도 희미한 그것

선승(禪僧)입네 하는 내가 부끄럽기만!

夜冷窓如水

臥看第二燈

雙光不到處

依舊愧禪僧

 

 

 

 

<39>

 

 

병상에서

病監後園

 

 

선(禪)을 말하다니 속된 짓이요

그물 뜨는 이 몸이 어찌 중이리.

홀홀 낙엽짐이 가장 설거니

가을 매는 노(繩)가 없어 안타까와라.

談禪人亦俗

結網我何僧

最憐黃葉落

繫秋原無繩

 

 

<40>

 

 

기러기

咏雁

 

 

 

외기러기 슬픈 울음 멀리 들리고

별도 몇 개 반짝여 밤빛이 짙다.

등불 사위어 가고 잠도 안 오는데

언제 풀리느냐고 옥리(獄吏)가 묻는다.

一雁秋聲遠

數星夜色多

燈深猶未宿

獄吏問歸家

 

아득한 하늘 가에 외기러기 우니

옥에 가득 가을 소리 꼬리를 끄네.

갈대를 비추는 달 말하는 외에

그 어떤 원설상(圓舌相)이 있다는 건가.

天涯一雁叫

滿獄秋聲長

道破蘆月外

有何圓舌相

 

<41>

 

 

벚꽃

見櫻花有感

 

 

지난 겨울 내린 눈이 꽃과 같더니

이 봄에는 꽃이 되려 눈과 같구나.

눈과 꽃 참 아님을 뻔히 알면서

내 마음은 왜 이리도 찢어지는지.

昨冬雪如花

今春花如雪

雪花共非眞

如何心欲裂

 

 

 

 

 

<42>

 

 

빗속에 홀로 노래하다.

雨中獨唫

 

 

섬나라라 비바람 흔해서

높다란 이 집은 오월에도 춥다.

목석도 아닌 만리 밖 나그네

말없이 푸른 산을 대해 앉노니.

海國多風雨

高堂五月寒

有心萬里客

無語對靑巒

 

<43>

 

 

 

회포를 읊음

懷唫

 

 

 

기러기도 이곳에는 적은 탓인지

밤마다 기다려도 고향 소식 드물고

달 뜨면 숲에 그림자 쓸쓸한데

국경이라 바람 타고 번지는 피리 소리.

시든 버들 보면 봄술 생각나고

다듬이 소리 남아 새옷 없음 안타까와……

한 해가 또 마지막 가려는데

반평생을 보낸 것 산등성이구나.

此地雁群少

鄕音夜夜稀

空林月影寂

寒戌角聲飛

衰柳思春酒

殘砧悲舊衣

歲色落萍水

浮生半翠微

 

<44>

 

 

영산포의 배 안에서

榮山浦舟中

 

 

어적(漁笛) 소리 들리는 밤 강에는 달이 밝고

술집의 등불 환한 기슭은 가을.

외로운 돛배에 하늘이 물 같은데

사람은 갈꽃 따라 하염없이 흐르노니!

漁笛一江月

酒燈兩岸秋

孤帆天似水

人逐荻花流

 

 

 

 

 

 

<45>

 

 

구암폭포

龜巖瀑

 

 

가을철 산에 폭포 급하니

뜬세상 늙은 몸이 부끄러워라.

밤낮으로 흘러서 어딜 감이랴

천고(千古)의 인걸들 그려 보느니.

秋山瀑㳍急

浮世愧殘春

日夜欲何往

回看千古人

 

<46>

매화 예찬

又古人梅題下不作五古余有好奇心試唫

 

매화를 반가이 만나려거든

그대여, 눈 쌓인 강촌(江村)으로 오게.

저렇게 얼음 같은 뼈대이거니

전생(前生)에는 백옥(白玉)의 넋이었던가.

낮에 보면 낮대로 기이한 모습,

밤이라 그 마음이야 어두워지랴.

긴 바람 피리 타고 멀리 번지고

따스한 날 선방(禪房)으로 스미는 향기!

매화로 하여 봄인데도 시구에는 냉기 어리고

따스한 술잔 들며 긴긴 밤 새우는 것.

하이얀 꽃잎 언제나 달빛을 띠고

붉은 그것 아침 햇살 바라보는 듯

그윽한 선비 있어 사랑하노니

날씨가 차갑다 문을 닫으랴.

강남의 어지러운 다소의 일은

아예, 매화에겐 말하지 말라.

세상에 지기(知己)가 어디 흔한가.

매화를 상대하여 이 밤 취하리.

梅花何處在

雪裡多江村

今生寒氷骨

前身白玉魂

形容晝亦奇

精神夜不昏

長風散鐵笛

暖日入禪園

三春詩句冷

遙夜酒盃溫

白何帶夜月

紅堪對朝暾

幽人抱孤賞

耐寒不掩門

江南事蒼黃

莫向梅友言

人間知己少

相對倒深尊

 

<47>

 

 

한가함

咏閑

 

 

깊은 산속에 부치니 그윽한 꿈

집은 높은 데라 한없이 생각은 달리고……

찬 구름 시내에서 일면

가냘픈 달은 언덕을 지나느니.

텅 비어 얽매임 없는 몸은

도리어 제가 저를 잊기도 해라.

窮山寄幽夢

危屋絶遠想

寒雲生碧澗

纖月度蒼岡

曠然還自失

一身各相忘

 

 

<48>

 

 

한가한 노래

閑唫

 

 

 

 

중년(中年)에 인생의 헛됨을 알아

산을 의지해 따로 집을 마련했다.

섣달이 지나 남은 눈에 시를 쓰고

봄을 맞아 온갖 꽃을 즐긴다.

돌멩이 여남은 개 빌어다 쌓아

자꾸 꾀는 구름을 막고,

내 마음 어지간히 학이 되었는 듯

이 밖에서 덩실덩실 춤추며 산다.

中歲知空劫

依山別置家

經臘題殘雪

迎春論百花

借來十石少

除去一雲多

將心半化鶴

此外又婆娑

 

 

 

<49>

 

 

번민

自悶

 

 

잠들면 잠든 대로 꿈은 괴롭고

깨면 달빛 속에 끝없는 생각.

한 몸으로 이 두 적(敵) 어이 견디랴.

아침 되니 어느덧 백발 되었네.

枕上夢何苦

月中思亦長

一身受二敵

朝來鬢髮蒼

 

 

 

 

 

 

<50>

 

 

새벽

曉日

 

 

먼 숲에 안개 끼니 버들인 양하고

눈 내린 고목(古木)에는 꽃이 피었네.

이는 곧 자연의 시가 아닌가.

하늘의 조화는 끝을 모를레.

遠林烟似柳

古木雪爲花

無言句自得

不奈天機多

 

 

<51>

 

 

새벽 경치

曉景

 

하늘 높이 달 걸리고 나무에선 구름이 이는데

높은 산 저 숲에는 남은 밤 걸리었네.

요란히 울리던 종소리 그치니

끊어졌던 외로움 다시 이어지느니!

月逈雲生木

高林殘夜懸

撩落鍾聲盡

孤情斷復連

 

창가에 밤이 걷히고

나는 누운 채 시를 읊는다.

다시 잠들어 즐거운 나비

또 꿈 속에 매화를 찾는다.

山窓夜已盡

猶臥朗唫詩

栩然更做夢

復上梅花枝

 

온 산에 외기러기 날고

나무들은 몇 번이나 종소리 냈나.

낡은 집에 승려 홀로 있어서

젊었어도 늙은인 양 움츠리고 사느니!

千山一雁影

萬樹幾鍾聲

古屋獨僧在

芳年白首情

 

 

<52>

 

청정한 노래

淸唫

 

먼 물가에 외로운 꽃이 벌고

몇 개의 종 걸린 곳 대숲이 차군.

견성(見性)이 이미 된 줄 알지 못하여

오히려 사물을 처음 보듯 보느니!

一水孤花逈

數鍾千竹寒

不知禪已破

猶向物初看

 

 

 

<53>

 

눈 내린 새벽

雪曉

 

고운 새벽 빛 판자집에 스미니

너무 당황해 나가 놀지 못하네.

한 점의 구름 성 위로 옮아 가고

어지러운 저 봉우리 달이 넘어가……

추운 마음, 눈에 덮인 나무를 휘돌고

아득히 창주(滄洲)를 지나는 새 꿈!

바람 일어 종소리 급한데

아, 역력히 천지가 떠 있구나.

曉色通板屋

怱怱不可遊

層郭孤雲去

亂峰殘月收

寒情遶玉樹

新夢過滄洲

風起鍾聲急

乾坤歷歷浮

 

 

<54>

 

 

동지

冬至

 

 

 

엊저녁 뜻밖에도 우레 소리 들리더니

오늘 아침 기쁜 중 끝없는 생각.

궁벽한 산중에 또 한 해가 가고

이 나라에 처음으로 봄이 생기는 때,

문을 열어 새해의 복을 맞고

친구에게 해가 묵은 편지를 띄운다.

자연의 조화 곳곳에 움직이거니

고요히 바라보며 내 집에 정이 간다.

昨夜雷聲至

今朝意有餘

窮山歲去後

故國春生初

開戶迓新福

向人送舊書

群機皆鼓動

靜觀愛吾廬

 

 

<55>

 

 

본 대로 느낀 대로(1)

卽事

 

 

여기 저기 남은 눈에 햇볕 한결 따스하고

먼 숲에 어린 것 봄의 기미(氣味) 분명하네.

앓고 나 바라보기에 느껴움은 이럴까.

殘雪日光動

遠林春意過

山屋病初起

新情不奈何

 

 

 

 

 

 

<56>

 

 

본 대로 느낀 대로(2)

卽事

 

 

산 밑에는 햇빛이 쨍쨍 비치고

산 위에는 어지러이 눈이 날린다.

한 산에 음양(陰陽)이 이리 다르니

시인이 있어 가슴 메인다.

山下日杲杲

山上雪紛紛

陰陽各自妙

詩人空斷魂

 

 

<57>

 

 

본 대로 느낀 대로(3)

卽事

 

 

태양을 몰아치듯 삭풍이 부는 속에

강변의 성을 대하여 서면

한 무더기 안개 나무에 맞아 치솟고

얇은 어스름 뜰에 내린다.

천리에 산 그림자 지는 때

여기는 눈이라도 내릴 듯한 기색.

시정(詩情)이 국경을 싸고 도는데

기러기 떼지어 하늘 날음을 보노니……

朔風吹白日

獨立對江城

孤烟接樹直

輕夕落庭橫

千里山容滴

一方雪意生

詩思動邊塞

侶鴻過太淸

 

 

 

<58>

 

 

본 대로 느낀 대로(4)

卽事

 

 

조그만 암자 태고(太古)처럼 고요한데

홀로 난간에 기대어 앉으면

마른 나뭇잎 서글피 소리내고

주린 까마귀 그림자가 차다.

구름은 돌아가다 고목(古木)에 끊기고

지는 해 반쯤 서산에 걸려……

온 산에 쌓인 눈 마주 보자니

봄 기운 천지에 돌아오는 기색!

一庵何寂寞

塊坐依欄干

枯葉作聲惡

飢烏爲影寒

歸雲斷古木

落日半空山

獨對千峰雪

淑光天地還

 

북풍이 일어 기러기 끊기고

백일(白日)에 나그네 시름은 차다.

고요히 천지를 두루 살피니

구름만 만고에 한가한 것을……

北風雁影絶

白日客愁寒

冷眼觀天地

一雲萬古閒

 

 

 

<59>

 

 

본 대로 느낀 대로(5)

卽事

 

 

먹구름 걷히는 곳 둥두렷한 달

찬 그 빛 먼 나무 곱게 적시고

학도 날아가고 고요한 산엔

누군가 잔설(殘雪) 밟고 가는 발소리.

烏雲散盡孤月橫

遠樹寒光歷歷生

空山鶴去今無夢

殘雪人歸夜有聲

 

홍매(紅梅) 꽃이 벌어 중은 삼매에 들고

소낙비 지나가매 차도 한결 맛이 맑아……

호계(虎溪)까지 전송하고 크게 웃다니!

잠시 도연명의 인품 그리어 보네.

紅梅開處禪初合

白雨過時茶半淸

虛設虎溪亦自笑

停思還憶陶淵明

 

 

 

 

<60>

 

 

무제(1)

無題

 

 

시름으로 해 고요한 밤이 싫고

술이 다하매 추울까 겁이 난다.

천리 밖 그 사람 하도 그리워

마음은 그곳으로 달려가 서성거린다.

愁來厭夜靜

酒盡怯寒生

千里懷人急

心隨未到情

 

늙은 나이라 머리칼 짧아져도

해바라기 닮아서 뜻은 장하다.

산집에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는데

매화는 벌어 봄밤이 향기롭다.

桑楡髮已短

葵藿心猶長

山家雪未消

梅發春宵香

 

구름 끊어지니 시를 얻고

눈 오는 날 술이 익는다.

서성거리며 천고(千古)를 생각노니

아, 길이 밝은 저 하늘의 달!

雲斷詩成韻

雪來酒動香

縱步思千古

靑天明月長

 

땅이 야위어 구름 가늘고

가난 탓이랴 매화가 더디 핀다.

은사(隱士)의 마음은 사슴 같아서

매양 닭과 개와 함께 노닌다.

地瘠雲生細

家貧梅發遲

幽人心似鹿

鷄犬每相隨

 

기슭의 대숲은 옥인 양 희고

시내에 구름 끼니 옷을 펼친 듯.

아무래도 저 산에 눈이 오겠는데

이따금 어디론지 까마귀가 날아간다.

岸竹立千玉

磵雲臥一衣

他山雪意重

時見寒鴉飛

 

흐르는 이 물은 영웅의 눈물

지는 꽃은 재사(才士)의 시름이거니

청산이 좋다고 이르지 말라.

시내라 숲은 해골투성이임을!

流水英雄淚

落花才子愁

莫道靑山好

溪林半觸縷

 

돌에 부딪쳐 시내는 소리 내고

달이 흐림은 구름 탓이 많네.

그대 그려 마음은 날아가서

한 해 다 가도 돌아올 줄 모르네.

溪響每因石

月陰半借雲

思君心獨往

抵歲不相分

 

매화를 비추는 달 학이 지키고

구슬이 흐르는데 솔바람 소리!

내 마음은 대나무를 닮은 탓인지

느끼는 것 있어도 말을 잊는다.

鶴守梅花月

玉流松柏風

堪憐心學竹

得眞失之空

 

 

<61>

 

무제(2)

無題

 

날로 추위 심해 문밖 안 나갔더니

시내의 돌들은 옥 되어 살쪘다고.

공중에 길 없는데 새는 어디로 나나.

산 속의 보금자리 구름 아직 안 돌아와……

억지 술로 시름을 잊으려니 계략인즉 졸렬하고

굳이 잠들어 꿈을 이루려 해도 술책 어긋나……

한 하늘 눈바람 속 사람 먼 곳 있는데

온통 희어진 머리 저녁 해 받아 섰느니!

日覺甚寒不出扉

報言澗石玉爲肥

空中無路鳥何去

山裡有家雲未歸

勒酒消愁計已拙

强眼做夢術且違

一天風雪美人遠

華髮滿頭負夕暉

 

명검(名劍)은 갈기 전에 날카롭고

좋은 꽃은 진 뒤에도 향기로운 것.

어여쁘다 하늘의 둥두렷한 달

홀로 내 마음 길이 비치느니……

名劒磨前快

好花落後香

可憐天上月

獨照片心長

 

 

<62>

 

홀로 있는 밤

獨夜 二首

 

 

밝은 달 하늘 가로 기울어지고

이 긴 밤 홀로 누워 듣는 솔 소리.

잠시도 동문(洞門) 밖을 안 나갔건만

산수(山水) 찾는 버릇은 그대로 남아 있네.

天末無塵明月去

孤枕長夜聽松琴

一念不出洞門外

惟有千山萬水心

 

숲에 맺힌 이슬 달빛에 싸락눈 같고

물 건너 들려 오는 어느 집 다듬이 소리.

저 산들이야 하냥 저기 있으련만

매화꽃 필 적이면 고향 찾아 돌아가리.

玉林垂露月如霰

隔水砧聲江女寒

兩岸靑山皆萬古

梅花初發定僧還

 

 

<63>

 

구곡령을 지나며

過九曲嶺

 

 

천리 밖 섣달 눈을 다 보내고서

지리산 깊은 골짝 봄볕에 길을 가면

하늘에 닿을 듯한 구곡령 길도

뒤틀린 내 마음의 그 길이엔 못 미치리.

過盡臘雪千里客

智異山裡趁春陽

去天無尺九曲路

轉回不及我心長

 

 

 

 

 

 

<64>

 

규방의 한

春閨怨

 

 

원앙새 수놓다가 끝도 못 내고

창 건너 속삭임에 더욱 애태워……

잠이 들면 밤새도록 꿈은 꿈대로

강남에 가 돌아올 줄 까맣게 잊네.

一幅鴛鴦繡未了

隔窓微語雜春愁

夜來刀尺成孤夢

行到江南不復收

 

<65>

 

 

 

한가히 노닐며

閒遊

 

 

반평생 겪은 풍진(風塵) 도(道) 또한 없는 몸은

천애(天涯)에 윤락하여 산수(山水) 찾아 노닐 뿐

시 되면 벽에다 쓰고 달 따라 언덕에 놀고……

높은 노래 끊이는 곳 천고(千古)를 생각느니

그윽한 흥 일어날 땐 스러지는 온갖 시름

돌아가 구름 속 누우면 꿈도 산수 더듬네.

半世風塵無道術

天涯淪落但淸遊

偶得新詩題白屋

又隨明月到靑邱

高歌斷處思千古

幽興來時消百愁

夜闌歸臥白雲榻

夢似丹靑自不收

 

<66>

 

 

나비

蝴蝶

 

봄바람에 꽃을 찾아 분주하거니

아마도 사람이면 탕자(蕩子)쯤 되리.

가뜩이나 꿈인 세상 꿈을 덧붙여

그 당시의 어느 시름 씻었단 말인가.

東風事在百花頭

恐是人間蕩子流

可憐添做浮生夢

消了當年第幾愁

 

 

 

 

 

<67>

 

 

매화 꽃잎

觀落梅有感

 

우주의 크나큰 조화로 하여

선원(禪院) 가득 예전대로 매화가 벌어……

머리 돌려 삼생(三生)의 일 물으렸더니

한가을 유마(維摩)네 집 반은 꽃 졌네.

宇宙百年大活計

寒梅依舊滿禪家

回頭欲問三生事

一秩維磨半落花

 

 

 

<68>

 

 

봄꿈

春夢

 

꿈은 낙화 같고, 꽃은 되레 꿈인 것을

사람은 왜 나비 되고 나비는 왜 사람 되나.

이 모두가 마음의 장난이거니

동군(東君) 찾아 이 한 봄을 못 가도록 만들고자.

夢似落花花似夢

人何胡蝶蝶何人

蝶花人夢同心事

往訴東君留一春

 

 

 

 

<69>

 

 

번민을 풀다

遣悶

 

 

봄시름과 봄비는 으스스 춥기에

봄술 한 병으로 만난(萬難) 물리쳐……

봄술에 취하여서 봄꿈 이루니

개자씨에 수미산 넣어도 남네.

春愁春雨不勝寒

春酒一壺排萬難

一酣春酒作春夢

須彌納芥亦復寬

 

 

 

 

<70>

 

 

산골집 흥취

山家逸興

 

 

누가 사는지 물가의 두세 채 집

낮에도 문을 닫아 놀을 막네.

돌을 둘러 앉으면 바둑 소리 대숲을 울리고

구름에 잔질하니 꽃 보며 안 마시는 술이란 없어……

십년을 한 신 끌기로 고상함 무엇 해치리

만사는 표주박 속 비었어도 관계 없네.

석양의 나무 그늘 앉을 만하니

만산 신록(滿山新綠) 속에 풀피리를 듣느니!

兩三傍水是誰家

晝掩板扉隔彩霞

圍石有碁皆響竹

酌雲無酒不傾花

十年一履高何妨

萬事半瓢空亦佳

春樹斜陽堪可坐

滿山滴翠聽樵茄

 

 

 

<71>

 

 

개인 날

唫晴

 

 

나무들은 뜰에 그림자 떨구고 장마비 개니

발로 스미는 가을 기운 선(禪)인 양 써늘하다.

고국 산천은 꿈속이면 바로 거긴데

대낮에 지는 저 꽃 소리도 없어……

庭樹落陰梅雨晴

半簾秋氣和禪生

故國靑山夢一髮

落花深晝渾無聲

 

 

 

 

<72>

 

 

산의 대낮

山晝

 

 

봉우리 창에 모여 그림인 양하고

눈바람은 몰아쳐 지난해인 듯.

인경(人境)이 고요하고 낮 기운 찬 날

매화꽃 지는 곳에 삼생(三生)이 공(空)이어라.

群峰蝟集到窓中

風雪凄然去歲同

人境寥寥晝氣冷

梅花落處三生空

 

<73>

 

 

구암사의 초가을

龜岩寺初秋

 

 

옛절에 가을 되니 마음 절로 맑아지고

달빛 속 높이 달린 박꽃이 희다.

서리 안 와 남쪽 골짜기 단풍나무 숲

서너 가지 몇 잎새가 겨우 붉어져……

古寺秋來人自空

匏花高發月明中

霜前南峽楓林語

纔見三枝數葉紅

 

 

 

 

 

 

<74>

 

가을 밤비

秋夜雨

 

 

정(定)에 드니 담담하기 물 같은 심경

향불 다시 피어나고 밤도 깊은 듯.

문득 오동잎 두들기는 가을비 소리

으스스 새삼스레 밤이 차구나.

床頭禪味澹如水

吹起香灰夜欲闌

萬葉梧桐秋雨急

虛窓殘夢不勝寒

 

 

 

 

<75>

 

회포

述懷

 

 

마음은 빗장 잠근 집과 같아서

무엇 하나 묘한 경지 든 적이 없어……

천리 밖 오늘 밤도 또한 꿈임을

달빛 속에 가을 나무 어지러이 춤추네.

心如疎屋不關扉

萬事會無入妙微

千里今宵亦一夢

月明秋樹夜紛飛

 

 

 

 

<76>

 

선방 뒷뜰에 올라

登禪房後園

 

 

양쪽 기슭 괴괴하여 번거로움 없고

풍광(風光)에 취하다 보니 때도 잊는다.

절 안에 미풍 일고 햇볕 찌는 듯한데

가을 향기 끝없이 옷에 감기네.

兩岸寥寥萬事稀

幽人自賞未輕歸

院裡微風日欲煮

秋香無數撲禪衣

 

 

 

 

<77>

 

9월 9일

重陽

 

 

설악산 백담사에 오늘은 구월 구일

온 나무 잎이 지고 내 병도 낫네.

구름이 흐르거니 누군 나그네 아니며

국화 이미 피었는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시냇물 말라 돌이 구슬 같고

하늘 높이 기러기 나는 곳 먼지와 멀어……

낮 되어 다시 방석 위 일어서니

첩첩한 천봉만학(千峰萬壑) 문으로 들어오네.

九月九日百潭寺

萬樹歸根病離身

閒雲不定孰非客

黃花已發我何人

溪磵水落晴有玉

鴻雁秋高逈無塵

午來更起蒲團上

千峰入戶碧嶙峋

 

 

 

<78>

 

 

들길을 걸으며

野行

 

 

쓸쓸히 말을 몰아 석양을 가면

강 둔덕 버드나무 노래진 잎새.

머리를 돌려도 고국 길 안 뵈고

만리라 가을 바람 고향 생각뿐!

匹馬蕭蕭渡夕陽

江堤楊柳變新黃

回頭不見關山路

萬里秋風憶故鄕

 

우연히 지나니 낡은 나루터

물에서는 잔 고기들 꼬리를 치고

구름은 서풍 좇아 밀려 가는데

해질녘 홀로 서서 가을을 본다.

尋趣偶過古渡頭

盈盈一水小魚游

汀雲已逐西風去

獨立斜陽見素秋

 

 

 

 

<79>

 

가을 밤에 빗소리를 듣고

秋夜聽雨有感

 

 

영웅도 신선도 아니 배운 채

국화와의 인연만 공연히 어겨……

등불 밑에 흰머리 무수한 이 밤

떠돌기 서른 핼세, 빗소리, 가을비 소리!

不學英雄不學仙

寒盟虛負黃花緣

靑燈華髮秋無數

蕭雨雨聲三十年

 

 

 

 

 

<80>

 

 

한강

漢江

 

 

한강에 와서 보니 강물은 길고

깊은 물결 말 없는데 가을빛 어려……

모르괘라, 들국화는 어디 폈는지.

때로 서풍 타고 향기 풍기네.

行到漢江江水長

深深無語見秋光

野菊不知何處在

西風時有暗傳香

 

<81>

 

피리 소리 흐르는데

漁笛

 

 

안개 낀 강에 돛배가 한 척!

갈대꽃 따라 피리 소리 흐르는데

단풍 든 그 너머 낙조(落照)는 지고

반평생의 지음(知音)은 백구가 알리

가락 기막히니 둔세(遯世)의 꿈 어찌 견디랴.

곡조 끝나도 애끊는 시름 달래지 못해……

그 소리 바람인 듯 날려 내 가슴 치니

천지에 가득한 쓸쓸함 스러질 줄 몰라라.

孤帆風烟一竹秋

數聲暗逐荻花流

晩江落調隔紅樹

半世知音問白鷗

韻絶何堪遯世夢

曲終虛負斷腸愁

飄掩律呂撲人冷

滿地蕭蕭散不收

 

 

 

 

<82>

 

먼 생각

遠思

 

 

국화 핀 남녘과 북쪽 기러기

오늘은 앉아서 괜히 생각나……

눈 그치면 그 강산엔 달빛이 곱고

바람에 초목들은 쇠북인 양 울리.

국경 밖 천리 벌에 꿈은 달려도

하늘 끝 정자 속에 누운 몸이여!

야위고 추위 겪어 대와 같거니

내 마음 공명(功名)에야 원래 먼 것을.

南國黃花北地雁

居然今日但空情

雪後江山多月色

風前草木盡鍾聲

塞外夢飛千里野

天涯身臥一雲亭

歷瘦經寒人似竹

此心元不到功名

 

 

 

<83>

 

 

창가를 스치는 비바람

獨窓風雨

 

 

사천리 밖에서 홀로 애태우노니

가을 바람 불 적마다 흰머리 생겨……

낮잠을 놀라 깨니 사람 안 뵈고

뜰에 가득 비바람 몰아치며 가을의 소리!

四千里外獨傷情

日日秋風白髮生

驚罷晝眠人不見

滿庭風雨作秋聲

 

 

 

 

<84>

 

시 쓰는 버릇을 웃다

自笑詩癖

 

 

시(詩)로 해 야윔이 달긴 달아도

얼굴에 살 빠지고 입맛도 잃고.

세속을 떠난 양 자처도 하네만

이 또한 병이로세 내 청춘 삼킨.

詩瘦太酣反奪人

紅顔減肉口無珍

自說吾輩出世俗

可憐聲病失靑春

 

 

 

<85>

 

 

옛 뜻

古意

 

 

어떤 승패가 헛되지 않으리요.

천금을 던져 찾으니 벼르던 산천.

호해(湖海)를 떠도는 몸은 위태롭기 머리칼 같은데

풍진(風塵)에 시달린 꿈 그 몇 생(生)을 거듭했다.

푸른 산 저 황토는 반이 사람의 뼈

물에 뜬 부평초는 이 세상 모습일레.

흥망에 관한 일은 책에서도 안 읽노니

동창에 달 밝은 이 밤 말없이 누었노라.

輸嬴萬事落空枰

虛擲千金尋舊盟

湖海蕩魂都一髮

風塵餘夢幾三生

靑山黃土半人骨

白水蒼萍共世情

對書不讀興亡句

無語東窓臥月明

 

<86>

 

 

산가의 새벽

山家曉日

 

 

일어나니 창 밖에는 눈이 날리어

온 산을 메웠구나 이 새벽녘.

마을 집 아늑하여 그림 같은데

샘솟는 시정(詩情)에는 병도 잊느니……

山窓睡起雪初下

况復千林欲曙時

漁家野戶皆圖畵

病裡尋詩情亦奇

 

 

 

 

 

 

<87>

 

 

눈꽃

內院庵有牧丹樹古枝受雪如花因唫

 

 

달빛 아니라도 눈은 고운 것

고목에 꽃이 벌어 향기 풍기네.

가지 위 차가운 저 정령(精靈)이야

길고 긴 내 시름관 무관한 고움!

雪艶無月雜山光

枯樹寒花收夜香

分明枝上冷精魄

不入人愁萬里長

 

 

<88>

 

문틈 사이로 본 세월

備風雪閉內外戶窓黑痣看書戲作

 

 

추위를 막고자 문틈 바르니

낮인데도 방안엔 어둠이 깔려

책 펼쳐도 이(二)와 삼(三)이 구분 안 가기에

눈을 감고 어디가 남, 어디가 북인지를 생각도 했네.

風雪撲飛重閉戶

晝齋歷歷見宵光

對書不辨二三字

闔眼試思南北方

 

산가(山家)의 방문이 조화옹되어

여닫는 데 따라서 주야 바뀌네.

자기 집 명암도 애매하거니

우습네, 달력 지어 파는 그 사람!

山堂門戶化翁作

開闔便看晝夜新

自家不解明暗理

還笑人間賣曆人

 

 

<89>

 

 

홀로 앉아

獨坐

 

 

북풍 이리 심한 밤은

종이 울리자 일찍 문을 잠근다.

눈 소리에 귀 기울이면 등에서는 불꽃이 피고

붉은 종이로 오려 붙인 매화 무늬에선 향기 풍기느니.

석 자의 거문고에 학(鶴)을 곁들이고

한 칸의 달빛과 구름과 사는 나.

우연히 육조(六朝) 일 생각나

말하고자 고개 돌려도 안 보이는 사람이여!

朔風吹斷侵長夜

隔樹鍾聲獨閉門

靑燈聞雪寒生火

紅帖剪梅香在文

三尺新琴伴以鶴

一間明月與之雲

偶然思得六朝事

欲說轉頭未見君

 

 

<90>

 

눈 오는 밤 그림을 보고

雪夜看畵有感

 

 

한밤중 눈바람은 그치지 않고

인정과 저무는 해(年) 어긋남 많네.

지금껏 가난과는 친근한 사이

늙어가며 술에는 또 속으며 사네.

매화에 추위 스미니 향기 쉬 스러지고

등불 사위는 밤 늙은이 꿈은 기약키 어려워……

저 그림 속 고기잡이 노인은 참 부럽군.

앉아서 봄철 물에 잔물결침 보느니!

風雪中宵不盡吹

人情歲色共參差

生來慣被黃金負

老去忍從白酒欺

寒透殘梅香易失

燈深華髮夢難期

畵裡漁翁眞可羨

坐看春水緣生漪

 

 

<91>

 

 

눈 그친 후에

雪後漫唫

 

 

숨어 산다고 자연에야 탐심 없으랴.

흐뭇한 경치 만나면 흥취 끝없네.

쏟아지던 눈 그치니 별유천지(別有天地)요.

온 산이 저물 때면 장한 마음도 일어……

지난해 사귄 고기잡이 나무꾼들 모두 꿈에 나타나고

겨울을 견딘 매화와 대나무 내 정을 끄네.

영웅이라 호걸이라 별것 있는가.

다시 듣노니 천하를 움직이는 봄의 속삭임!

幽人寂寂每縱觀

眼欲靑時意不輕

大雪初晴塵世遠

萬山欲暮壯心生

經歲漁樵皆入夢

忍冬梅竹亦關情

萬古英雄一評後

更聽四海動春聲

 

 

<92>

추운 적막

寒寂

 

 

요즘은 날이 추워 문을 닫고

산수(山水)를 제대로 찾지도 못한다.

눈바람 집을 메워 고요도 고요한데

봄술 들며 낙매(落梅)를 보는 듯 선미(禪味)에 취한다.

不善耐寒日閉戶

觀山聽水未能多

雪風埋屋人相寂

禪如春酒散梅花

 

요즘은 날로 추위 심해지는데

앞을 막는 것은 은산(銀山)과 철벽(鐵壁)!

하늘을 나는 학(鶴)도 아닌 몸

마음의 구름 못 헤쳐 안타깝다.

閑居日日覺深寒

坐中鐵壁復銀山

却恥吾身不似鶴

禪心未破空相看

 

 

<93>

 

 

의심이 씻은 듯 풀리다

悟道頌

 

 

남아가 가는 곳은 어디나 고향인 것을

그 몇 사람 객수(客愁) 속에 길이 갇혔나.

한 마디 버럭 질러 삼천세계(三千世界) 뒤흔드니

눈 속에 점점이 복사꽃 붉게 지네.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桃花片片飛

 

 

(丁巳十二月三日夜十時頃坐禪中忽聞風打墜物聲疑情頓釋仍得一詩)

* 이 시는 한용운의 ‘오도송’ 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당대의 고승 만공선사가 만해선사로부터 이 오도송을 받아보고 마지막 구절의 홍(紅)을 비(飛)로 고치라고 했다고 합니다. ‘꽃잎이 붉다’로 해석할 수도 있고, ‘꽃잎이 흩어진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님의침묵서예대전 집행부에서는 한문학자의 조언을 받아 이들 두 글자를 모두 맞는 글자로 인정하겠습니다.

 

 

 

<94>

 

피란 길

避亂途中滯雨有感

 

 

쌓인 세월, 한 해도 얼마 아니 남았는데

왜놈의 군대 소리 산골에도 울리네.

이 천지를 뒤집어 훔쳐 가려 하거니

먼 땅 비바람도 정이 가누나.

崢嶸歲色矮於人

海國兵聲接絶嶙

顚倒湖山飛欲去

天涯風雨亦相親

 

 

 

 

 

 

<95>

 

 

옥중의 감회

獄中感懷

 

 

물처럼 맑은 심경 티끌 하나 없는 밤

철창으로 새로 돋는 달빛 고와라.

우락(憂樂)이 공이요 마음만이 있거니

석가도 원래는 예사 사람일 뿐.

一念但覺淨無塵

鐵窓明月自生新

憂樂本空唯心在

釋迦原來尋常人

 

 

<96>

출정 군인 아내의 한

征婦怨

 

이 가슴 메우는 시름 임의 탓이니

쓸쓸하기 가을 같지 않은 날 없네.

내 얼굴 야윔이야 별것 아니네만

행여 그이 백발이나 안 되셨는지.

어젯밤엔 강에 나가 연밥 따다가

흠뻑 눈물만 물에 보탰네.

구름에 기러기 없고 물도 급히 안 흐르니

물이라 구름이라 차라리 외면하고.

마음은 봄바람에 지는 꽃 같아

꿈에도 달을 따라 옥관(玉關)을 넘어가네.

두 손 모아 하늘에 비옵는 것은

우리 임 봄과 함께 돌아오는 일.

임은 안 오시고 봄은 이미 저무는데

짓궂은 비바람은 꽃가지 흔드누나.

내 시름의 크기를 정녕 안다면

강도 호수도 깊다 못 하네.

마음 층층마다 맺힌 이 시름

꽃도 달도 팔아서 무심(無心) 배우리.

妾本無愁郞有愁

年年無日不三秋

紅顔憔悴亦何傷

只恐阿郞又白頭

昨夜江南採蓮去

淚水一夜添江流

雲乎無雁水無魚

雲水水雲共不看

心如落花謝春風

夢隨飛月渡玉關

雙手慇懃敬天祝

郞與春色一馬還

阿郞不到春已暮

風雨無數打花林

妾愁不必問多少

春江夜湖不言深

一層有心一層愁

賣花賣月學無心

 

<97>

 

가을 느낌

秋懷

 

날 위한 십년이 허사가 되고

겨우 한몸 옥중에 눕게 되었네.

기쁜 소식 안 오고 벌레 울음 요란한데

몇 오리 흰 머리칼 또 추풍(秋風)이 일어……

十年報國劍全空

只許一身在獄中

捷使不來虫語急

數莖白髮又秋風

 

 

 

 

<98>

 

 

눈 오는 밤

雪夜

 

 

감옥 그 둘레에 눈이 펑펑 내리는 밤

이불은 춥기도 춥고 꿈도 또한 차가와……

철창도 매어 놓지 못하는가

들려 오는 종소리!

四山圍獄雪如海

衾寒如鐵夢如灰

鐵窓猶有鎖不得

夜聞鍾聲何處來

 

 

<99>

 

앵무새만도 못한 몸

一日與隣房通話爲看守窃聽雙手被輕縛二分間卽唫

 

농산의 앵무새는 말을 곧잘 하느니

그 새만도 훨씬 못한 이 몸 부끄러워라.

웅변은 은이요 침묵이 금일 바엔

이 금으로 자유의 꽃 몽땅 사고자.

隴山鸚鵡能言語

愧我不及彼鳥多

雄辯銀兮沈黙金

此金買盡自由花

 

 

 

 

<100>

 

 

안중근 의사를 기림

安海州

 

 

만 석의 뜨거운 피 열 말의 담(膽)!

한 칼을 벼려 내니 서리가 날려

고요한 밤 갑자기 벼락이 치며

불꽃 튀는 그곳에 가을 하늘 높아라.

萬斛熱血十斗膽

淬盡一劍霜有鞱

霹靂忽破夜寂寞

鐵花亂飛秋色高

 

 

<101>

 

매천 황현을 기림

黃梅泉

 

 

의(義)에 나아가 나라 위해 죽으니

만고에 그 절개 꽃피어 새로우리.

다하지 못한 한은 남기지 말라

그 충절 위로하는 사람 많으리니!

就義從容永報國

一瞑萬古劫花新

莫留不盡泉臺恨

大慰苦忠自有人

 

 

 

<102>

 

맑은 새벽

淸曉

 

 

다락에 앉으니 뭇 생각 끊이는데

새벽달 따라 추위가 생겨나……

물을 끼얹은 듯 인기척 없는 곳

어렴풋한 시상 피리에 화답하느니!

高樓獨坐絶群情

庭樹寒從曉月生

一堂如水收人氣

詩思有無和笛聲

 

 

<103>

 

영호 화상

贈映湖和尙述未嘗見

 

 

고운 여인, 거문고 줄 둥둥 퉁기니

봉황새 춤을 추고 신선이 내려……

얕은 담장 그 너머 사람 안 뵈고

가을 날 창밖으로 아득한 생각!

玉女彈琴楊柳屋

鳳凰起舞下神仙

竹外短墻人不見

隔窓秋思杳如年

 

 

 

 

 

<104>

 

 

오세암에서 쓰는 편지

自京歸五歲庵贈朴漢永

 

 

한 하늘 한 달이건만 그대 어디 계신지

단풍에 묻힌 산속 나 홀로 돌아왔네.

밝은 달과 단풍을 잊기는 해도

마음만은 그대 따라 헤매는구나!

一天明月君何在

滿地丹楓我獨來

明月丹楓共相忘

唯有我心共徘徊

 

 

<105>

 

 

도반을 기리는 노래(1)

京城逢映湖錦峯兩伯同唫

 

 

 

짧은 머리 흩날리며 티끌 속 들어오니

인생의 덧없음이 날로 새삼 느껴져라.

눈 내린 천산만수 꿈에도 선하거니

머리 들어 육조 풍류(六朝風流) 얘기함도 우습고녀.

蕭蕭短髮入紅塵

感覺浮生日日新

雪後千山皆入夢

回頭漫說六朝人

 

시는 볼품 없어지고 취하면 교기(驕氣)만이 느는데

하룻밤 새에 영웅들 모두 초부(樵夫)가 되었다고.

두렵기는 그지없이 고운 이 강산

시인 없어 적료(寂寥) 속에 하마 묻힐까.

詩欲疎凉酒欲驕

英雄一夜盡樵蕘

只恐湖月無何處

一夢靑山入寂寥

 

 

<106>

 

 

도반을 기리는 노래(2)

與映湖乳雲兩伯夜唫

 

 

모이니 불우한 옛 벗들인데

조촐히 노니는 산중 밤도 깊었다.

말없이 타는 촛불 눈물도 식고

꿈같이 번지는 시수(詩愁) 먼 종소리.

落拓吾人皆古情

山房夜闌小遊淸

紅燭無言灰已冷

詩愁如夢隔鍾聲

 

무지갠 양 밤중에 흥취는 뻗어

붓 들어 시 이루면 누가 굽히리.

오직 삼춘(三春)은 하루와 같이

좋은 풍경 시켜서 손짓해 부르네.

中宵文氣通虹橋

筆下成詩猶敢驕

只許三春如一日

別區烟月復招招

 

 

<107>

 

도반을 기리는 노래(3)

釋王寺逢映湖乳雲兩和尙作

 

 

어수선한 반년이었네 나라 날로 기우는데

손 하나 못 쓰는 우리 모였으니 공연한 짓.

하룻밤 등불 밑에 만나 반갑고

천고의 흥망이야 아예 말을 말게.

좌선을 마치매 인기척 없고

외국에서 시(詩) 오니 기러기 소리.

게으른 몸 태평성세 좋음은 알아

부처님께 머리 조아려 상감의 복을 비네.

半歲蒼黃勢欲分

憐吾無用集如雲

一宵燈火喜相見

千古興亡不願聞

夜樓禪盡收人氣

異域詩來送雁群

疎慵惟識昇平好

禮拜金仙祝聖君

 

세상에서 귀한 것 지기(知己)이거니

한 마디 말도 간담을 이리 울림을!

영웅들 이야기로 긴 밤 새우고

문장을 논하노라니 맑은 바람 일어라.

기러기떼 꿈처럼 아득히 사라지고

외로운 등(燈) 물가 방에 시도 하마 붉으렷다.

풍경만 언제나 이리 좋다면

담소하며 우리 함께 늙음도 좋으리.

知己世爲天下功

片言直至肝膽中

漫說英雄消永夜

更論文句到淸風

征雁楓橋如夢遠

孤燈水屋感詩紅

幸敎烟月時時好

談笑同歸白髮翁

 

 

<108>

 

도반을 기리는 노래(4)

與映湖錦峯兩伯作(在宗務院)

 

 

지난날 일마다 소홀했노니

만겁인들 한바탕 꿈이 아니랴.

강남(江南)의 이른 봄빛 보려 안한 채

동성(東城)의 눈바람 속 누워 책을 읽느니.

昔年事事不勝疎

萬劫寥寥一夢餘

不見江南春色早

東城風雪臥看書

 

 

 

 

 

 

 

<109>

 

금봉 선사

與錦峯伯夜唫

 

 

시와 술 서로 만나 즐기니 천리 타향

쓸쓸한 이 한밤에 생각 아니 무궁하랴.

달 밝고 국화 벌어 애틋한 꿈 없었던들

가을철 옛 절이기로 어딘 고향 아니리.

詩酒相逢天一方

蕭蕭夜色思何長

黃花明月若無夢

古寺荒秋亦故鄕

 

 

<110>

 

 

옛 벗에게 주는 글

贈古友禪話

 

 

어여쁜 온갖 꽃을 모두 보았고

안개 속 꽃다운 풀 두루 누볐네.

그러나 매화만은 못 만났는데

눈바람 이러하니 어쩜 좋으랴.

看盡百花正可愛

縱橫芳草踏烟霞

一樹寒梅將不得

其如滿地風雪何

 

 

 

 

<111>

 

 

완호 학사와 헤어지며

別玩豪學士

 

 

떠도는 인생이기 이별은 있어

그대를 보내노니 국화 설운 빛!

텅 빈 역사(驛舍)와 슬픔만 남고

하늘가 가을 소리 몸에 스며라.

萍水蕭蕭不禁別

送君今日又黃花

依舊驛亭惆悵在

天涯秋聲自相多

 

 

<112>

 

 

선비의 죽음을 조상함

代萬化和尙挽林鄕長

 

 

이 세상 버리고 그대 가시니

남은 우리네만 슬퍼할밖에!

흰머리 뉘 막으리 눈물 짓고

어느덧 국화는 피어 애를 끊는 날.

설운 사연 외오매 까마귀 나무에 내리고

두고 간 산천 통곡은 끝이 없네.

뉘라서 지는 해야 붙든다 하랴

가을 비바람만 옷에 안기네.

君棄人間天上去

人間猶有自心傷

世情白髮不禁淚

歲事黃花正斷腸

哀詞落木寒鴉在

痛哭殘山剩水長

公道斜陽莫可追

秋風秋雨滿衣裳

 

 

<113>

 

 

구암사에서 본 풍경

龜巖寺與宋淸巖兄弟共唫

 

 

멀리 흘러온 산 가을 해 저무는데

얇은 놀인 듯 성긴 머리 슬프다.

앓기 전 새삼덩굴에 걸린 달 보았거니

좌선이 끝난 뒤에도 국화는 아니 벌어……

철 늦은 버들 누구 위해 가지 끝 안 드시는지.

한가한 저 구름도 나처럼 집이 없네.

동타(銅駝)와 가시나무 어느 것 꿈 아니리.

옛날의 영웅들 공연히 으쓱댔네.

遠客空山秋日斜

澹霞疎髮隔如紗

病前已見碧蘿月

禪後未開黃菊花

晩柳爲誰偏有緖

閒雲與我共無家

銅駝荊棘孰非夢

終古英雄漫自誇

 

 

<114>

 

지광 선사에게 답함

和智光伯(遺以詩文故答)

 

 

글과 글씨에선 향기 풍기고

한 폭의 그림인 양 내 간장 그려 냈네.

천산만수(千山萬水) 밖 홀로 살건만

친구는 내 마음 알아 주었네.

文佳筆絶卽生香

一幅畵寫九曲腸

獨在千山萬水外

故人只許寸心長

 

 

 

 

 

 

 

<115>

 

 

아사다 교수에게 답함

和淺田敎授(淺田斧山遺以參禪詩故以此答)

 

 

본성은 그대와 나 차이 없건만

참선에 열중도 못하는 몸은

도리어 미로에서 허덕이느니

언제나 산 속으로 들어갈는지.

天眞與我間無髮

自笑吾生不耐探

反入許多葛藤裡

春山何日到晴嵐

 

 

<116>

 

 

 

남형우에게 주는 시

贈南亨祐

 

 

가을빛 물든 산에 해가 지는데

홀로 서서 노래하면 천지에 울려……

몇 오리 흰 머리칼 세월은 물 같아도

만 포기 국화꽃은 서리 맞아 피는 것을.

먼 그곳 편지도 안 오는 날 벌레들 시끄럽고

고목(古木)은 무심해도 이끼 껴 향기롭네.

출가(出家)한 지도 어느덧 마흔 핸데

부끄러우이, 여전히 빈 선상(禪床) 지키는 몸!

秋山落日望蒼蒼

獨立高歌響八荒

白髮數莖東逝水

黃花萬本夜迎霜

遠書不至虫猶語

古木無心苔自香

四十年來出世事

慚愧依舊坐空床

 

 

<117>

 

계초 선생

謹賀啓礎先生晬辰

 

 

서녘에서 온 기운 기이도 하여

비와 구름 그 조화 때를 알아라.

큰 붓 잡으면 살활(殺活)이 자재(自在)인데

수재들은 또 얼마나 모인 것이랴.

용을 잡고 호랑이 치기쯤 마음대로요

학이나 갈매기와 벗할 날도 있으리.

‘남산처럼 사소서’ 축수하는 날

봄 삼월 이 기쁨 펴기 좋고녀.

西來一氣正堪寄

覆雨飜雲自有時

大筆如椽能殺活

英才似竹又參差

屠龍搏虎固任意

訪鶴問鷗亦可期

祝壽南山漢水上

陽春三月足新禧

 

 

* 계초는 조선일보 창건주 方應謨의 호.

 

 

<118>

 

 

영호화상의 시에 부쳐

次映湖和尙

 

 

종소리 그치니 눈 쌓인 산들 새삼 고운데

향수와 시상(詩想) 앞다투어 일어나……

새해 들어 핀 매화 처음으로 꿈에 들어오고

그대가 보내 준 시는 바로 선(禪)이더군.

절 안에 향이 자욱하니 전생인 듯 생각되고

고요한 경안(經案) 머리 연꽃이 피려 하네.

이 속의 경치 함께 즐김직하나

그대의 인연 못 닿음 정말 섭섭하네.

鍾後千林雪後天

鄕情詩思自相先

侵歲梅花初入夢

故人書字卽爲禪

佛界香深如宿世

經案晝靜欲生蓮

此中有景可同賞

敬弔先生下及緣

 

 

<119>

 

매천의 시에 부쳐

留仙岩寺次梅泉韻

 

 

참으로 불만에 찬 반년이었기

천애(天涯)에 윤락(淪落)하여 산수 찾았네.

앓고 난 흰머리는 가을따라 성겨지리

난후(亂後)에 국화는 펴 풀도 또한 무성해……

겁(劫)을 강(講)하니 구름 스러진 뒤 물소리 듣고

경을 듣던 사람 돌아가자 선조(仙鳥)가 내려……

온통 천지가 풍진을 만난 이때

두보의 난중시(亂中詩)를 읊조리고 앉았것다.

半歲蕭蕭不滿心

天涯零落獨相尋

病餘華髮秋將薄

亂後黃花草復深

講劫雲空聞逝水

聽經人去下仙禽

乾坤正當風塵節

肯數西川杜甫唫

 

 

<120>

 

매화를 노래함

讀雅頌朱子用東坡韻賦梅花用其韻賦梅花

 

 

해가 지고 눈 내리는 강남의 외딴 마을

매화 나무에는 겹겹이 시혼(詩魂)이 핀다.

가지마다 변방의 피리 소리 들려 오고

하늘에는 가녀린 달 어슴푸레한 눈매!

이런 밤이면 고요히 향수는 일어

십년을 못 찾은 산천이 그립다.

모든 꽃 봄날에 피네만 영욕 많기에

추운 이 철을 차마 못 버린다.

어찌 비 속에 교태 지으며

아침 해 향해 곁눈질야 하랴.

아, 여기에 송죽을 벗삼아

조촐히 그 마음 지키며 사는 꽃.

매화를 두고 이러니 저러니 읊기야 쉬워도

정작 그 좋음이야 무엇이라 나타내랴.

매화여! 우리는 함께 염세가(厭世家)거니

그대 지기 전 술 한 잔 하세.

江南暮雪有孤村

玉樹層層降詩魂

枝枝散入塞外笛

纖月蒼凉不染昏

夜杳連娟歸夢寂

十年虛盟負故園

却恥春風多榮辱

千寒萬寒不事溫

嬌態不勝帶晩雨

新意那堪向朝暾

左有左松右有竹

一世相守不掩門

雖愛高名易成句

深看佳處還無言

君我俱是厭世者

芳年未闌共對尊

 

 

<121>

 

 

화엄사 산보

華嚴寺散步

 

 

옛절에 봄이 되니 조망이 좋아

잔잔한 강 먼 물에 잔 물결 인다.

머리 돌려 천리 밖 바라보노니

백설가(白雪歌)에 화답할 이 어찌 없으랴.

古寺逢春宜眺望

潺江遠水始生波

回首雲山千里外

奈無人和白雪歌

 

둘이 와 시내 위에 돌에 앉으니

소리내는 산골물 주름도 안 져……

양 기슭의 청산에 저녁 해 비칠 때

돌아가며 흥얼대니 저절로 노래 되네.

二人來坐溪上石

磵水有聲不見波

兩岸靑山斜陽外

歸語無心自成歌

 

 

<122>

 

 

오세암

五歲庵

 

 

구름과 물 있으니 이웃할 만하고

보리(菩提)도 잊었거니 하물며 인(仁)일 것가.

저자 멀매 송차(松茶)로 약을 대신하고

산이 깊어 고기와 새 어쩌다가 사람을 구경해……

아무 일도 없음이 참다운 고요 아니오

첫 뜻을 어기지 않는 것 진정한 새로움이거니.

비 와도 끄떡없는 파초와만 같다면

난들 티끌 속 달려가기 꺼릴 것이 있겠는가.

有雲有水足相隣

□ □ □ □*況復仁

市遠松茶堪煎藥

山窮魚鳥忽逢人

絶無一事還非靜

莫負初盟是爲新

倘若芭蕉雨後立

此身何厭走黃塵

 

 

*네 결자가 있어서 앞뒤 문맥으로 보아 ‘忘却菩提’를 나름대로 보충하여 번역했다.

 

 

<122>

 

 

증상사

增上寺

 

 

경쇠가 울려서야 단에서 내려

차를 딸아 들고 난간에 기대면

비는 겨우 개고 서늘한 바람 일어

발로 스미는 기운 수정(水晶) 같구나.

淸磬一聲初下壇

更添新茗依欄干

舊雨纔晴輕凉動

空簾晝氣水晶寒

 

 

 

 

 

 

<123>

 

 

약사암 가는 길

藥師庵途中

 

 

십리도 반나절쯤 구경하며 갈만은 하니

구름 속 길이 이리 그윽할 줄야!

시내 따라 가노라니 물도 다한 곳.

꽃 없는데도 숲에서 풍겨오는 아, 산의 향기여!

十里猶堪半日行

白雲有路何幽長

緣溪轉入水窮處

深樹無花山自香

 

 

<124>

 

 

양진암의 봄

養眞庵餞春

 

 

저녁 비, 종소리에 봄을 또 보내느니

흰머리 다시 늘어 가슴 아파라.

한 많고 일 많은 이 몸으로야

나머지 꽃 주인 노릇 어찌 해내리.

暮雨寒鍾伴送春

不堪蒼髮又生新

吾生多恨亦多事

肯將殘花作主人

 

 

 

<125>

 

향로암 야경

香爐庵夜唫

 

 

남국에도 시절 일러 국화 안 벌고

꿈이런 듯 먼 강호(江湖) 눈에 삼삼해……

기러기 나는 산속 사람은 갇혔는데

끝없는 가을 숲에 달이 돋는다.

南國黃花早未開

江湖薄夢入樓臺

雁影山河人似楚

無邊秋樹月初來

 

 

<126>

 

 

쌍계루

雙溪樓

 

 

이 다락 속기(俗氣) 없어 고승 같으니

이루련들 인력으론 될 바 아니네.

학은 아직 안 날아도 향 이미 풍겨 오고

내 이제 나그네 되니 가을이 먼저 깊어가……

빗방울인 양 벼랑에 매달린 풍림(楓林) 위태로운데

나무에 걸린 구름 없으매 산골 물 맑네.

나라 안에 형제들 나도 많거니

이 다음 모두 함께 올 작정일세.

一樓絶俗似高僧

欲致定非力以能

鶴未歸天香已

人今爲客秋先增

懸崖如雨楓林急

穿樹無雲澗水澄

海內弟兄吾亦有

大期他日盡歡登

 

 

<127>

 

 

향적봉 풍경

次映湖和尙香積韻

 

 

숲은 썰렁한데 밝은 달빛이

구름과 눈 비추니 완연한 바다.

십만 그루 그 구슬 하도 고와서

조화인 줄 모르고 그림인가고.

蔓木森凉孤月明

碧雲層雪夜生溟

十萬珠玉收不得

不知是鬼是丹靑

 

 

 

<128>

 

 

고향 생각

思鄕

 

 

한 해가 또 가려는데 밤은 길어서

잠 못 들고 그 몇 번을 새삼 놀랐나.

구름 걸린 희미한 달 꿈은 외로와

창주(滄洲) 아닌 고향으로 마음 달리네.

歲暮寒窓方夜永

低頭不寐幾驚魂

抹雲淡月成孤夢

不向滄洲向故園

 

 

 

<129>

 

비오는 날의 고향 생각

思夜聽雨

 

 

동경(東京)은 팔월인데 편지 안 오고

아득히 달리는 생각 걷잡지 못해……

외로운 등불 빗소리 차가운 밤

내가 앓아 누웠던 그때만 같네.

東京八月雁書遲

秋思杳茫無處期

孤燈小雨雨聲冷

太似往年臥病時

 

 

 

 

 

 

<130>

 

 

고향을 생각하는 괴로움

思鄕苦

 

 

심지를 안 따도 등잔불 타는 밤

온몸은 자지러지고 넋 또한 나가……

꿈꾸니 매화가 학 되어 나타나

옷자락 당기면서 고향 소식 얘기하네.

寒燈未剔紅連結

百髓低低未見魂

梅花入夢化新鶴

引把衣裳說故園

 

 

<131>

 

 

닛코로 가는 길

日光道中

 

 

아녀자들 다투어 이르는 말이

이 길 가면 별유천지 있느니라고.

물 따라 걸으며 살펴볼수록

우리 고국 산천 많이 닮았네.

試聞兒女爭相傳

報道此中別有天

逐水漸看兩岸去

杳然恰似舊山川

 

 

 

 

 

<132>

 

 

 

닛코의 호수

日光南湖

 

 

신타산(神陀山) 그 속에 호수 있어서

산빛과 물빛이 겹쳐 맴돌아……

몇 개의 피리 소리 십여 척의 배

일제히 노래하며 석양 이고 돌아오네.

神陀山中湖水開

山光水色共徘徊

十數小船一兩笛

夕陽唱倒漁歌來

 

 

<133>

 

미야지마의 배 안에서

宮島舟中

 

 

먼 이역 외로움은 그대로 시름!

배에 찬 봄의 정은 걷잡지 못해……

모두가 부슬비 오는 도원(桃源)만 같아

꿈인 양 꽃 지는 날 영주(瀛洲)를 지나가다.

天涯孤興化爲愁

滿艇春心自不收

恰似桃源烟雨裡

落花餘夢過瀛洲

 

 

 

 

 

<134>

 

 

시모노세키의 배 안에서

馬關舟中

 

 

저녁 빛 깔린 바다 바람이 몰아치니

물결은 다투어 치솟고 낙일(落日)의 장한 모습!

부슬비 내리는 속 먼 나그네

한 병의 봄술 차고 하늘가 이르르다.

長風吹盡侵輕夕

萬水爭飛落日圓

遠客孤舟烟雨裡

一壼春酒到天邊

 

 

<135>

 

 

 

병든 봄

病唫

 

 

병이 깊이 드니 일은 모두 낭패인데

창 밖의 눈바람은 왜 그리도 날뛰는지.

마음은 앓기 전과 다름없거니

거울 속 희어진 머리 차마 고쳐 못 볼레!

頑病侵尋卽事黃

窓前風雪太顚狂

浩思蕩情何歷歷

不耐鏡中鬢髮蒼

 

몸은 버들 같고 병은 말인 양 하여

이 몸에 매인 병은 풀릴 줄 몰라……

대수롭지 않게 마음엔 생각해도

비바람 이리 치는 밤이야 차마 어찌 잠들리.

身如弱柳病如馬

上下相繫正爾何

縱使我心無復苦

孤燈風雨忍虛過

 

 

<136>

 

회갑날의 즉흥

周甲日卽興(一九三九. 七. 十二日於淸凉寺)

 

 

바쁘게도 지나간 예순 한 해가

이 세상에선 소겁(小劫)같이 긴 생애라고.

세월이 흰 머리를 짧게 했건만

풍상(風霜)도 일편단심 어쩌지 못해……

가난을 달게 여기니 범골(凡骨)도 바뀐 듯

병을 버려 두매 좋은 방문(方文) 누가 알리.

물 같은 내 여생을 그대여 묻지 말게.

숲에 가득 매미 소리 사양(斜陽) 향해 가는 몸을!

怱怱六十一年光

云是人間小劫桑

歲月縱令白髮短

風霜無奈丹心長

聽貧已覺換凡骨

任病誰知得妙方

流水餘生君莫問

蟬聲萬樹趁斜陽

 

 

<137>

 

신문이 폐간되다

新聞廢刊

 

 

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키도 쓸쓸한 망국의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硯池)를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느니!

筆絶墨飛白日休

銜枚人散古城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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