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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한문)

한용운의 옥중 한시

by 목향정광옥서예가 2021. 7. 4.

한용운의 옥중 한시 아홉 수


만해 한용운 시인이 1926년에 자비로 펴낸 시집 님의 침묵이 없었더라면 1920년대의 우리 문단은,

아니 한국 시문학사는 얼마나 공허해졌을까.

민족대표 33인 중 한용운이 없었더라면 민족자결을 내세운 31운동의 정신이 과연

제대로 발아하고 개화할 수 있었을까.

한용운 선사가 없었더라면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한국 불교계는 어느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만해는 이 땅의 가장 위대한 시인 혹은 민족정신의 사표로 일컬어질 수 있으며,

독립투사나 종교지도자, 아니 조직운동가나 혁명가로 불리어도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1944년에 돌아가셨으니 선생이 가신 지도 어언 56년이 되었다.

시인 한용운의 업적을 기려 만해문학상이 제정되어 다년간 시상을 해오고 있고,

해마다 여름이 되면 백담사에서 만해시인학교가 열리고 있다.

선생의 사상과 문학을 연구한 글을 모은 만해새얼이라는 간행물도 나오고 있다.

만해는 예순여섯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생애를 사는 동안 시는 물론 장편소설단편소설시조수필한시 등

많은 문학작품과 그에 못지않게 많은 논문논설雜俎(각종 일을 써 모은 기록)를 남겼다.

논저 朝鮮佛敎維新論과 편저 佛敎大典』『精選講義 菜根譚,

그리고 선언서 朝鮮獨立를 작품 연보에서 뺄 수는 없다.

 

 

만해가 남긴 한시는 1,300여 수에 이른다.

그간 몇 사람 국문학자가 만해의 한시를 연구한 바 있는데, 김종균의 한용운의 한시와 시조

(어문연구21, 1979), 이병주의 만해 선사의 한시와 그 특성(동국대 한국문학 학술회의, 1980),

송명희의 한용운의 한시론(한용운연구, 새문사, 1982)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만해가 옥중에서 쓴 한시를 중심으로 해서 쓴 논문은 없다.


그간 만해의 문학세계와 불교사상을 연구한 글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나왔고,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100편이 넘는 한용운론 가운데 옥중에서 쓴 한시가 전혀 논의된 적이 없는

이 땅의 문학연구와 문학사는 나를 안타깝게 한다.

만해의 한시에 깃들어 있는 시정신을 탐색하여 고전적 가치를 논해보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작은 목적이다.


만해는 3.1운동의 주동자로서 가회동에 있는 손병희의 집을 수차례 방문하여

그로 하여금 민족대표 발기인의 서두에 서명하게 한다.

선생은 또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수정하고 여기에 행동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공약삼장을 첨가한다.

거사일인 31일 경성 명월관 지점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곧바로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 감금된 만해는 해를 넘겨 192089일에야

경성지방법원 제1형사부에서 3년형을 선고받는다.

3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1922년에 출감했으니 만해의 옥중시는 전부

님의 침묵을 내기 전에 썼던 작품임에 틀림없다.

투옥되고 재판을 받고 석방되는 과정에서 만해에 관한 일화가 몇 개 전해지고 있다.


왜경에 끌려갈 때 그는 이른바 옥중투쟁 삼대원칙을 제시했으니

변호사를 대지 말 것,

私食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신청하지 말 것 등이 그것이다.

 

 
법정의 심문에서 조선인이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는데 왜 일인의 재판을 받느냐고 대답을 거부,

그 대신에 쓴 것이 명논설 一 獨立宣言理由書였다.
같이 수감된 독립운동의 동료들이 극형을 받으리란 소식을 듣고 안색이 파래지자

독립만세를 부르고도 살아날 생각들을 했단 말이야?”고 외치며 옆에 있던 변기를 던지기도 했다.

그들이 출옥할 때 얼싸안고 환호, 위로하는 영접 인사들에게 만해는 침을 뱉으며 일갈했다.


더러운 자식들, 오죽 못났으면 영접을 해?

너희들은 왜 영접을 받지 못하니!”


김병익, 韓國 文壇史(일지사, 1973)에서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을지라도 생애 단 한 번도 훼절한 적이 없이 일제의 강압 통치에

불굴의 기개로 맞서 싸웠던 만해로서는 충분히 하고도 남았을 말이요 행동이다.

 

1879년생이므로 만해는 마흔한 살부터 마흔세 살까지 옥살이를 하였다.

만해가 투옥되어 있던 시기에 동인지 폐허백조가 창간되었고,

바로 전에 나온 창조도 계속 간행되어

우리 문단에서는 3.1운동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근대시가 등장하고 활발히 발표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 작품 활동을 한 남궁벽오상순황석우변영로(이상폐허동인)

홍사용박종화박영희이상화(이상백조동인)의 작품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비탄과 절망, 感傷悔恨의 정조에 사로잡혀 있다.

폐허창간호에서 오상순이 한

우리 조선은 황량한 폐허의 조선이요, 우리 시대는 비통한 번민의 시대이다라는 말은

그 무렵 대다수 지식인과 문학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당시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보면 시인의 몸과 마음이 모두

밀실동굴속에 갇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대는 말세, 계절은 가을이 아니면 겨울이었고,

시간은 늘 이었다.

같은 시기 감옥에 갇혀 있던 만해는 그러나 한겨울의 추위에도

정신의 칼을 날카롭게 벼리고 있었다.

그 시기에 만해가 쓴 시가 한글로 쓴 것이 아니라고 하여

문학적 가치를 무시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될 일이다.

만해가 옥중에서 쓴 한시를 서툰 솜씨로 번역하여 본다.

 

獄中吟(옥중에서 읊는다)


隴山鸚鵡能言語 농산의 앵무새는 언변도 좋네그려
愧我不及彼鳥多 내 그 새에 못 미치는 걸 많이 부끄러워했지
雄辯銀兮沈黙金 웅변은 은이라지만 침묵은 금
此金買盡自由花 이 금이라야 자유의 꽃 다 살 수 있네


이 시에 나오는 농산은 중국 섬서성 농현 서북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농산의 앵무새가 어떤 고사에 나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이 하는 말을 흉내 잘 내기로 이름난 새였던 모양이다.

만해가 과거에는 그 새의 언변에 못 미치는 것을 많이 부끄러워했지만

옥에 갇혀 침묵이 금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고는 자경록을 쓰듯이 이 시를 쓴 것이리라.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의 대표였으니 일제가 만해를 회유포섭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 것인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옥중에서 쓴 한시였으니 옥리의 눈에 띄어 고초를 겪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만해는 이곳에서 침묵을 지켜야 종국에는 자유의 꽃을

몽땅 사게 될 것이라고 자신을 경계했던 것이다.

 


見櫻花有感獄中作(벚꽃을 보고 느낌이 일어)

昨冬雪如花 지난 겨울 꽃 같던 눈
今春花如雪 올 봄 눈 같은 꽃
雪花共非眞 눈도 꽃도 참이 아닌 점에서는 같은 것을
如何心欲裂 어찌하여 마음의 욕구 이리 찢어지는지


만해는 자신의 눈을 현혹했던 꽃 같았던 눈과 눈 같았던 꽃을 참이 아닌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한다.

눈은 산천을 백색으로 수놓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녹아버리고,

일본의 국화 벚꽃은 피었다가 금방 난분분 흩날리며 떨어진다.

감옥 창살 밖으로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생각하니 이 나라는 완전히 일본인의 식민지가 되어 있고

해방이 될 희망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다.

만해는 어느 봄날 心欲裂이라며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이 시에다 토로해보았던 것이리라.

寄學生獄中作(학생에게 부친다)


瓦全生爲恥 헛된 삶 이어가며 부끄러워하느니
玉碎死亦佳 충절 위해 깨끗이 죽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滿天斬荊棘 하늘 가득 가시 자르는 고통으로
長嘯月明多 길게 부르짖지만 저 달은 많이 밝다


세 번째 번역해본 시는 제목이 寄學生獄中作이다.

제목으로 보아 면회를 온 학승에게 전해준 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瓦全玉碎는 정반대의 뜻이다.

아무 보람 없이 헛된 삶을 이어가는 瓦全과 명예와 충절을 지켜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는

玉碎를 시에다 써 감옥 바깥으로 전하는 일 자체가 큰 모험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보전코자 기개를 굽히고 사느니 차라리 깨끗이 죽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옥중에서 시로 썼으니 만해의 용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하늘 가득 가시 자르는 고통으로/ 길게 부르짖지만 저 달은 많이 밝다라는

뒤의 두 행이 제대로 번역이 된 것 같지는 않은데,

만해가 현재의 고통을 이겨내면 언젠가 이 옥문을 나서게 될 것이라고 달에 빗대어

다짐하고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다.

 


雪夜(눈 오는 밤)

四山圍獄雪如海 감옥 둘레 사방으로 산뿐인데 해일처럼 눈은 오고
衾寒如鐵夢如灰 무쇠처럼 찬 이불 속에서 재가 되는 꿈을 꾸네
鐵窓猶有鎖不得 철창의 쇠사슬 풀릴 기미 보이지 않는데
夜聞鐵聲何處來 심야에 어디서 쇳소리는 자꾸 들려오는지

 

충남 홍성의 생가


눈 내리는 밤의 감회를 읊조린 시이다.

무쇠처럼 찬 이불 속이니 그 겨울 만해의 옥고는 인간 인내의 한계점에 다다를 정도였나 보다.

재가 되는 꿈”(아니면 재 같은 꿈?)은 자신이 죽는 장면을 꿈에서 보았기에 표현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철창의 쇠창살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눈은 해일처럼 엄청나게 내리고 있다.

심야에 들려오는 쇳소리가 다른 방 옥문을 여는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 모두가 만해를 비감한 심사에 휩싸이게 해

이런 시를 썼을 것이다.


秋懷(가을 감회)

十年報國劒全空 십년 세월 보국하다 칼집 완전히 비고
只許一身在獄中 한 몸 다만 옥중에 있는 것이 허용되었네
捷使不來虫語急 이겼다는 기별 오지 않는데 벌레는 울어대고
數莖白髮又秋風 또다시 부는 가을바람에 늘어나는 백발이여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 행이 아니다.

옥에서야 머리를 기를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사십대 초반의 나이였으니 백발 운운은 과장법을 동원한 것일 듯.

그런데 捷使不來라는 대목이 있다.

捷報는 싸움에 이겼다는 보고나 소식이다.

만해는 고통스런 영어의 나날을 살면서도 捷使가 오지 않음을 못내 애통해하고 있었다.

죽음과 절망의 그림자에 휩싸여, 탄식과 눈물로 시를 수놓던 옥문 바깥의 시인들과는

사고의 기본 틀이 이토록 달랐던 것이다.

贈別(이별 노래)


天下逢未易 하늘 아래 만나기 쉽지 않은데
獄中別亦奇 옥중에서 하는 이별 기이할 밖에
舊盟猶未冷 옛 맹세 아직 안 식었으니
莫負黃花期 국화 피면 다시금 부담 없이 보세


먼저 출옥하는 사람에게 정표로 써서 건네준 시이다.

옥중에서 하는 이별이라 기이하다고 한 뒤 만해는 舊盟猶未冷이라고 썼다.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 했던 맹세가 아직 안 식었으니 국화 만발한 바깥세상에서 다시 만나되,

누가 먼저 나가고 누가 늦게 나갔는가에 대한 부담감을 피차 갖지 말고 만나자고

상대방을 오히려 위로한다.

해석의 여지가 있는 마지막 행이지만 나는 이런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砧聲(다듬이 소리)

 

何處砧聲至 어디서 나는 다듬이 소리인가
滿獄自生寒 감옥 속을 냉기로 가득 채우네
莫道天衣煖 천자의 옷 따뜻하다 하나 도가 아니다
孰如徹骨寒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것을


감옥에까지 들려온 다듬이 소리를 소재로 해서 쓴 시이다.

天衣天子의 옷, 仙人의 옷, 飛天(신선이나 선녀)의 옷 중 어느 것을 택해도 무방하겠지만

일제치하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여 천자의 옷으로 해석해보았다.

, 천자는 천황의 다른 말로 쓴 듯하다.

천의가 제아무리 따뜻하다고 한들 그것은 도가 아니며,

나는 지금 뼛속까지 냉기를 느끼고 있을 뿐이라며

일제의 침탈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마포 형무소

 

 咏燈影(등불 그림자를 보며)


夜冷窓如水 추운 밤 창에 물이 어리면
臥看第二燈 두 개의 등불 누워서 보게 되지
雙光不到處 두 불빛 못 미치는 이 자리에 있으니
依舊愧禪僧 선승인 것 못내 부끄럽기만 하다


만해는 이 시에서 천정에 매달려 있는 등과, 물 어린 창이 반사하고 있는 두 개의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이 누워 있는 자리에는 두 개의 불빛이 다 못 미치고 있다.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감옥이라는 공간을 생각해보면

이 시를 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선승이므로 구도의 길을 걸어가야 하거늘 지금 자신은 완전히 다른 세계,

곧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인 것이다. 그것을 애통해한 시가 바로 咏燈影이다.



咏雁二首獄中作(기러기 노래 두 수)


一雁秋聲遠 가을 기러기 한 마리 멀리서 울고
數星夜色多 밤에 헤아리는 별 색도 다양해
燈深猶未宿 등불 짙어지니 잠도 오지 않는데
獄吏問歸家 옥리는 집에 가고 싶지 않는가 묻는다

天涯一雁叫 하늘 끝 기러기 한 마리 울며 지나가니
滿獄秋聲長 감옥에도 가득히 가을 바람소리 뻗치는구나
道破蘆月外 갈대가 쓰러지는 길 저 밖의 달이여
有何圓舌椎 어찌하여 너는 둥근 쇠몽치 혀를 내미는 거냐


문학적 향기를 가장 짙게 풍기는 작품이다.

앞쪽 시에서 만해는 가을밤의 스산한 심사를 절묘하게 노래하는데,

그것으로는 무언가 미진했던 모양이다.

뒤쪽 시의 마지막 두 행에 주제가 담겨 있는 듯한데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달에 빗대어 만해는 圓舌椎라고 표현하였고, 나는 그것을 둥근 쇠몽치 혀로 해석하였다.

달은 차면 기우는 속성을 갖고 있으므로 만해는 말을 아끼자는 결심을 해본 것이 아닐까.

달이 내 신세를 알고 혀를 차고 있다고 생각해본 것일 수도 있다.

달은 밤길을 밝혀주므로 길 잃은 자를 안내하는 이로 빗대어본 것일지도 모른다.

기러기와 갈대는 부화뇌동하는 존재로, 달을 은인자중하는 존재로 그려본 것일까.

해석은 여러 가지로 해볼 수 있다.

아무튼 만해는 자연 상관물 몇 가지를 시의 소재로 끌어들여 깊어가는 가을밤에

자신의 처연한 심사를 읊어보았던 것이다.
옥중에서 쓴 것이 확실한 이들 작품 외에도 수많은 한시가 새로운 해석과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黃梅泉

就義從客永報國 의로운 그대 나라 위해 영면했으나
一瞋萬古刦花新 눈 부릅떠 억겁 세월 새 꽃으로 피어나리
莫留不盡泉坮恨 황매천 엄청난 한을 다하지 말고 남겨둡시다
大慰苦忠自有人 사람됨을 스스로 괴로워했던 것 크게 위로하고프니


매천 황현은 한일합병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한말의 문장가요 역사가이다.

만해는 황현의 엄청난 한을 늘 생각하며 시를 썼음을 알 수 있다.

다수 문인이 비탄에 잠겨 슬픔과 좌절을 노래하고 있을 때 만해는 흔들리지 않는 자존심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시가 바로 黃梅泉이다.

만해의 민족운동은 석방 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물산장려운동과 신간회 결성 운동에 참여하였고,

청년 法侶 비밀결사인 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신채호의 묘비를 건립하였다.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운동을 목숨을 내놓고 전개하였고,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된다고 성북동에 집을 지을 때 북향으로 지었다.

일제가 창씨개명과 징병을 강요하면서 불교계를 대표하는 만해의 찬성을 얻고자 회유책을 쓴 적이 있었다.

성북동 일대의 넓은 국유지를 한용운의 이름으로 불하하려 하자 만해는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하였다.

친일의 족적을 한 발자국도 남기지 않은 진정한 지식인 한용운이

옥중에서 쓴 한시 아홉 수가 오늘 내 가슴을 치는 것은

내 나이가 투옥 당시 만해의 나이와 똑같은 마흔하나이기 때문일까.

나는 만해가 쓴 한시 중 이상 몇 편을

우리 문학의 빛나는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싶다.

 

[국악명상음악]- "백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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