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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의 얼 선양

경포 호수 언덕길에 성현(聖賢)들의 시

by 목향 정광옥 서예가 2026. 5. 6.

경포 호수 언덕길에 성현(聖賢)들의 시 (詩)가 있는 모습

경포대
 
 

경포호수를 산책하기 위한 세 갈래 길이 있는데 경포 4거리 신호등을 지나 벚꽃길을 들어 서다보면 다리가 하나

나오는데 그 다리를 건너자 말자 우측으로 소로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길 양쪽으로 송강 정철선생의 시,율곡 이이 선생 시,교산 허균선생 시,허난설헌선생 시

등과 일부 경포대를 노래한 작가들의 시가 전시되어 있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중에서

空中玉簫 (공중옥소) 소리 어제런가 그제런가

나도 잠을 깨어 바다를 구버보니

깊이를 모르거니 가인들 엇디 알리

明月 (명월)이 千山萬落 (천산만락)의 아니 비친 곳 없다

송강 정철의 속미인곡 중에서

어와 虛事 (허사) 로다 이 님이 어디 갔는고

즉시 일어나 앉아 窓 (창)을 열고 밖을 바라보니

가엾은 그림자만이 날를 좇을 뿐이로다

차라리 죽어서 落月 (낙월)이나 되어서

임이 계신 窓 (창) 안에 환하게 비추리라

乞退蒙允感著首尾吟四絶名之日感君恩 (걸퇴몽윤감저수미음사절명지일감군은)

퇴직을 간청하여 허락을 받으매 감격스러워서 수미음 절구 1수를 읊어 감군은 이라 이름하다

君恩許退返鄕園 (군은허퇴반향원) 임금의 은혜 물러남을 허락받아 고향에 돌아오니

古木荒灣栗谷邨 (고목황만율곡촌) 늙은나무 쓸쓸한 물가 율곡 마을일세 (邨 마을 촌)

一味簞瓢生意足 (일미단표생의족) 대나무 밥과 표주박 물 살아 가기에 만족하니 (簞 대광주리 단,瓢 박 표)

耕田鑿井是君恩 (경전착정시군은) 밭 갈고 우물 파는 것 모두 임금 은혜일세 (耕 밭갈 경,鑿 뚫을 착)

將入內山遇雨 (장입내산우우) 내 산에 들어 가려다 비를 만나다

解綬歸來萬事輕 (해수귀래만사경) 벼슬 버리고 돌아 오니 만사가 홀가분 해

五臺奇勝最關情 (오대기승최관정) 오대산 절경에 가장 마음이 쏠리네

山靈灑雨非嫌客 (산영쇄우비혐객) 산신령 뿌린 비 나그네가 싫어서가 아니고 (灑 뿌릴 쇄,嫌 싫어할 혐)

添却林泉分外淸 (첨각임천분외청) 숲 속의 샘물 늘려서 더욱 맑게 함일레라 (添더할 첨,却 물리칠 각)

어와 허사로다 이 님이 어디 갔는고

결의 니러 안자 창을 열고 바라보니

어여쁜 그림자 날 쫓을 뿐이네

차라리 죽어서 낙월이나 되어서

님 계신 창 안에 환하게 비추리라

登湖如鍊海如彎 (등호여련해여만) 올라보니 비단 호수와 활 모양의 바다 (鍊 단련할 련,彎 굽을 만)

佳麗錢塘甲乙間 (가려전당갑을간) 아름 다움의 전당 서호와 앞을 다투네

(佳 아름다울 가,麗고을 려,錢 돈 전, 塘 못 당)

平浥蓬壺淸淺水 (평읍봉호청천수) 봉래산의 맑고 투명한 물을 떠다 놓은 듯 (浥 젖을 읍,壺 병 호淺 얕을 천)

巧粧西子淡濃顔 (교장서자담농안) 서시의화장을 한 듯 어여쁘구나

(巧 공교로을 교,粧 단장할 장,淡 물맑을 담,濃 짙을 농)

琉璃凝滑波中月 (유리응활파중월) 유리처럼 반짝이는 물결 속의 달이면

(琉 유리 유,璃 유리 리,凝 엉길 응,滑 미끄러울 활)

烟霞蔥籠畵裡山 (연하총롱화리산) 안개와 노을 영롱한 그림 속의 산이라

(霞 놀 하,蔥 파 총,籠 대그릇 롱,畵 그림 화,裡 속 리)

此地候仙樓坮好 (차지후선루대호) 신선을 기다리기에 딱 좋은 누대에 (坮 돈대 대)

永郞笙鶴幾時還 (영랑생학기시환) 영랑은 학을 타고 피리 불며 언제 도라 오려 나 (笙 생황 생,幾 기미 기)

●유원명 (柳遠鳴)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유학(幼學) 유운흡(柳雲翕)이고 어머니는 겸사복(兼司僕) 한덕룡(韓德龍)의 딸이다.

1789년(정조 13)에 진사(進士)에 올랐고, 1794년(정조 1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822년(순조 22)에 강릉에 부임되어 왔다가 1824년에 관직을 사퇴하고 돌아갔다.

중국 서호

바다 같은 호수의 경치 서호

항주는 4천년 전부터 고대 문화인 양저(良渚)문화가 번성했으며, 춘추시대에는 오·월 두 나라가 패권을 다툰 곳이기도 하다.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6국을 통일한 후, 이 지역에 전당현(錢糖縣)을 설치한 것이 항주 역사의 시작이라 한다. 도시 명칭은 수(隨) 개성(開星) 9년(589) 처음 쓰였으며, 그 후 항주는 오월(893~978년), 남송(1127~1279년)의 도읍으로 번성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절강성의 성도로, 정치

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됐으며, 서호(西湖)를 중심으로 한 명승지 항주는 중국 화동지방의 고도(古都)이다.

서호는 계절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여러 번 보아도 그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곳이다. 아침과 저녁, 맑은 날과 궂은 날에 보는 모습이 각기 다른 서호는 역대로 많은 문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곳으로, 백낙천과 소동파가 즐겨 시를 읊었던 곳이기도 하다.

물빛이 빛나고 맑으니 마침 좋고

비 오는 모습과 어우러진 산색이 또한 기이하네

서호를 서시에게 비교한다면

옅은 화장이나 짙은 화장이나 다 아름답다

水光瀲 晴方好 山色空濠雨亦奇 浴把西湖比西子 淡粧濃抹總相宣

이 시는 소동파가 서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음호상일초청후우(飮湖上一初晴後雨)〉라는 시다. 월나라 미인 서시(西施)에 비유해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 오는 날에도 좋다'고 할 만큼 아름답다는 것이다. 일명 서자호(西子湖)라는 이름도 소동파가 서호의 아름다움을 월나라의 이름난 미인이자, 오나라를 망하게 했던 항주의 여인 서시에 빗대어 붙인 이름이다.

서 시 (西 施)

①중국 월(越)나라의 미인. 오(吳)나라에게 패한 월나라 임금 구천(句踐)이 서시를 부차(夫差)에게 헌상하여 부차가 그 용모에 빠져 있는 사이에 오나라를 멸망시킨 데서 비롯된 말로, 인재를 선발하는데 있어 얼굴이나 용모만 보고 다른 능력을 평가하지 않는 경우의 비유로 사용함.

②어떤 일을 도모하는데 있어 흉내만 내고 실속이 없는 경우를 비유. 서시의 찡그린 모습조차 아름다워 그것을 흉내낸 이야기가 전해오면서 나온 비유

十二欄干碧玉臺(십이난간벽옥대) 열두 난간 벽옥 같은 누대에 올라보니

大瀛春色鏡前開(대영춘색경전개) 동해 큰 바다의 봄빛, 경포대 앞에 펼쳐있네

綠波淡淡無深處(녹파담담무심처) 봄 물결 잠잠하고 깊지도 않아

白鳥雙雙自去來(백조쌍쌍자거래) 흰 물새 쌍쌍이 한가히 날고

萬里歸仙雲外笛(만리귀선운외적) 먼 곳으로 돌아가는 신선의 구름 밖 피리소리 (笛 피리 적)

四時遊子月中杯(사시유자월중배) 철마다 유람하는 나그네의 달빛 속 한잔 술

東飛黃鶴知吾意(동비황학지오의) 동녘으로 날아드는 황학도 내 마음 알아

湖上徘徊故不催(호상배회고불최) 호수 위를 배회하되 재촉하지 않는구나

●심영경 (沈英慶)

去國舟 下海州 (거국주 하 해주) 도성을 떠나 배를 타고 해주로 내려가다

四遠雲俱黑 (사원운구흑) 사방은 구름으로 컴컴한데 (俱 함께 구)

中天日正明 (중천일정명) 중천에는 햇빛이 쨍쨍 하구나

孤臣一掬淚 (고신일국누) 외로운 신하의 한 줌 눈물 (掬 움킬 국,淚 눈물 누)

灑向漢陽城 (쇄향한양성) 님 계신 곳에 뿌리오리다 (灑 뿌릴 쇄)

送 慶可久 (世昌) 觀察關東

病被傷春甚 (병피상춘심) 병은 몸 시름에 부쩍 심하고 (被 이불 피,傷 상처 상,甚 심할 심)

詩從惜別成 (시종석별성) 시는 석별의 정에서 이루어 지누나 (惜 아낄 석)

動溟天下勝 (동명천하승) 동해 바다는 천하의 명승지이고 (溟 어두울 명)

玉節丈夫行 (옥절장부행) 옥 부절은 장부의 행차 이로세

暇日宜淸賞 (가일의청상) 한가한 날은 맑은 유람하기 좋고 (暇 겨를 가,宜 마땅할 의)

停雲憶友生 (정운억우생) 멈 춘 구름보며 벗을 생각 하겠지 (停 머무를 정,憶 생각할 억)

吾衰猶舊興 (오쇠유구흥) 나는 노쇠해도 옛 흥이 남았나니 (衰 쇠할 쇠,猶 오히려 유)

鏡浦潟空明 (경포석공명) 휘영청 달빛아래 경포대 펼쳐 지겠지 (潟 개펄 석)

●이 행 (李 荇)

조선전기 우찬성,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水)·청학도인(靑鶴道人). 지돈녕부사 이명신(李明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이추(李抽)이고, 아버지는 홍주목사 이의무(李宜茂)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교리(敎理) 성희(成熺)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 문과에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예문관 검열·봉교,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 하성절질정관(賀聖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수찬를 거쳐 홍문관교리까지 올랐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사간원헌납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고, 이어 함안으로 옮겨졌다가 1506년 초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홍문관교리로 등용되고, 이어 부응교로 승진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재능있는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하였다.

1513년(중종 8) 다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가 이듬해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사섬시정(司贍寺正)을 거쳐 1515년 사간원사간이 되고, 이어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신진 사류인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이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어 첨지중추부사·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얻고 있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에 내려갔다. 이듬해 병조참의·호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가 된 이후 우참찬·좌참찬·우찬성으로 승진하고,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을 책임맡아 끝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으로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이어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축출되면서 복관되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었으나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영 국 (詠 菊) 국화를 읊다

佳色掇時憐靖節 (가색철시련정절) 아름다운 빛 채취할 때 도연명이 가엽고

(掇 주을 철,憐 불쌍히여길 련,靖 꾀할 정)

落英餐處惜靈均 (낙영찬처석영균) 떨어진 꽃 밥 짓는 곳에 굴원이 애석하네

秋霜一著東離畔 (추상일저동리반) 가을 서리가 한 번 동쪽 울타리에 내리면

(著 나타날 저,離 떠날 리,畔 두둑 반)

只有此花無此人 (지유차화무차인) 이 꽃만 있을 뿐 그 사람은 없구나 (只 다만 지)

霞堂夜坐 (하당야좌)

移席對花樹 (이석대화수) 자리 옮겨 꽃나무랑 마주하고

下階臨玉泉 (하계임옥천) 계단 내려 가 맑은 샘에 다다랐네(階 섬돌 계)

因之候明月 (인지후명월) 이곳에서 밝은 달 기다리 자니

終夜望雲天 (종야망운천) 밤새로록 구름 낀 하늘만 바라보네

風流玆地絶 (풍류자지절) 이 지역의 뛰어난 경치는

不翅昔聞然 (불시석문연) 전에 들은 그 소문 이상이네 (翅 날개 시,昔 옛 석)

白白沙還鳥 (백백사환조) 희고 흰 모래엔 갈매기 돌아오고

蒼蒼樹亦然 (창창수역연) 푸르고 푸른 나무엔 또 연기가 피어 오르고

天從臺外偃 (천종대외언) 하늘은 경포대 밖에 드리웠고 (偃 쓰러질 언)

月正鏡中懸 (월정경중현) 달은 호수 가운데 달려 있네 (懸 매달 현)

秀句王孫有 (수구왕손유) 아름다운 글귀 왕손이 있어야 (秀 빼어날 수,句 글귀 구)

方知骨法仙 (방지곫접선) 바야흐로 골격의 신선을 안다네

●최 립 (崔 笠)

1539년(중종 34)∼1612년(광해군 4).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동고(東皐). 아버지는 진사 최자양(崔自陽)이다

최립은 빈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굴하지 않고 타고난 재질을 발휘했다. 1555년(명종 10) 17세의 나이로 진사가 됐고 1559년(명종 14)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여러 외직을 지낸 뒤에 1577년(선조 10)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1년(선조 14)재령군수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에 힘써 임금으로 부터 옷감을 받았다. 그 해에 다시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최립은 1584년(선조 17)에 호군(護軍)으로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을 했다. 1592년(선조 25)에 공주목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전주부윤을 거쳐 승문원제조를 지냈다. 그 해에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에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에 판결사(判決事)가 되었고 1606년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강릉부사를 지내고 형조참판에 이르러 사직했다. 그리고 평양에 은거했다.

최립은 당대 일류의 문장가로 인정을 받아 중국과의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했다. 그리고 중국에 갔을 때에 중국문단에 군림하고 있던 왕세정(王世貞)을 만나 문장을 논했다. 그 곳의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최립은 초(草)·목(木)·화(花)·석(石)의 40여 종을 소재로 한 시부(詩賦)가 유명하다. 역학(易學)에도 심오하여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 등의 2권의 저서가 있다. 그의 글과 차천로(車天輅)의 시와 한호(韓濩)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시보다 글로 이름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에서도 소식(蘇軾)과 황산곡(黃山谷)을 배워 품격이 호걸스러우며 음색이 굳세어 금석에서 나오는 소리 같다는 평을 들었다.

최립의 문장은 일시를 풍미했다. 당대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왕세정 일파의 문장을 따라 예스럽고 우아하며 간결하고 법도에 맞는 글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의고문체(擬古文體)에 뛰어났기 때문에 평범한 산문을 멀리하고 선진문(先秦文)을 모방하여 억지로 꾸미려는 경향이 있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송설체(宋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최립의 문집으로는 『간이집』이 있다. 시학서(詩學書)로는 『십가근체시(十家體詩)』와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등이 있다.

海雲亭口號 (해운정 구호) 해운정에서 읊다

神仙不可遇 (신선불가우) 신선을 만날 길이 없는데

岸上靑楓樹 (안상청풍수) 언덕 위엔 푸른 단풍나무만 있네

瀛海路茫茫 (영해로망망) 영해로 향하는 길은 아득한데

碧雲何處住 (벽운하처주) 푸른 구름은 어느 곳에 머물렀는지

風煙萬古護高臺 (풍연만고호고대) 바람 안개 만고토록 높은 대 호위하고

百頃平波一面開 (백경평파일면개) 백 이랑 평안하 물결 한쪽 면이 열렸네 (頃 잠깐 경)

日落海門歸鳥盡 (일락해문귀조진) 바다 어귀에 해 떨어지자 새들 돌아가고

月明唯有白鷗來 (월명유유백구래) 달 솟아 밝으니 오직 흰 갈매기만 나네

●구사맹 (具思孟)

조선시대 좌부승지,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시(景時), 호는 팔곡(八谷). 한성부판윤 구수영(具壽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구희경(具希璟)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 구순(具淳)이며, 어머니는 의신군(義新君) 이징원(李澄源)의 딸이다1549년(명종 4) 진사가 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역임하였다. 1560년 전적(典籍)이 된 뒤 사간원 정언을 거쳐 1563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조좌랑·이조정랑을 지내고, 사인(舍人)을 거쳐 사재감정(司宰監正)으로 재직 중, 1567년 명종이 죽자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가 되었다. 1569년(선조 2)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이어서 동부승지에 재직 중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76년 다시 기용되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형조참의 등을 거쳐 좌부승지로 있다가 다시 대간의 탄핵을 받고 남양부사로 나갔다. 1590년 좌부승지가 되고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해 의주로 피난하고, 평양으로부터 왕자를 호종한 공으로 이조참판에 올랐다. 1594년 지중추부사, 이듬 해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몽학(李夢鶴)의 역옥(逆獄)을 다스릴 때 국문(鞫問)에 참여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왕자와 후궁을 시종해 성천에 피난했으며, 이어서 좌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이 되었다.

그러나 1602년 맏아들인 구성(具宬)이 유배되자 곧 사직하였다.

선조 때 신진 사류들의 원로 사류에 대한 탄핵이 심해질 때 대부분의 사류들이 뜻을 굽혔으나, 끝내 신진을 따르지 않아 자주 탄핵을 받았다. 왕실과 인척이면서도 청렴결백하고 더욱 근신해 자제나 노복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였다.

죽은 뒤 호성(扈聖)·선무(宣武)·정난(靖難) 등의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1632년 정원군(定遠君)이 원종(元宗)으로, 그의 다섯째 딸이 인헌왕후로 추숭되자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구 성 (具 宬)

본관 능성(綾城). 자 원유(元裕). 호 초당(草塘). 시호 충숙(忠肅).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1589년 정언(正言)으로서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다룰 때 연루자 최영경(崔永慶)의 옥사(獄死)로 사건의 결말을 짓지 못하여 파직되었다. 얼마 뒤 병조좌랑으로 복직되어 성균직강 ·병조정랑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왕을 호종하고, 변란의 책임이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에게 있다고 주장하여 평해(平海)에 유배하게 하였다.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내고, 1596년 호조참판으로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 해주목사(海州牧使)를 거쳐 1601년 대사성(大司成)에 승진되었고, 이 해 정인홍(鄭仁弘)에게 기축옥사 때의 잘못을 추론(追論)당하여 홍주(洪州)에 유배되었다. 1604년 부친상으로 방환(放還)되어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능해군(綾海君)에 책봉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폐모론(廢論)이 일어나자,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아 유배의 논의가 있을 때 병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폐모의 정청에 참석하지 않은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집에 《초당집(草塘集)》이 있다.

采蓮曲 (채연곡) 연꽃따는 노래

秋淨長湖碧玉流 (추정장호벽옥류) 가을날 깨끗한 긴 호수는 푸른 옥이흐르는 듯

荷花深處繫蘭舟 (하화심처계란주)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배를 매어 두었네 (繫 맬 계)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련자) 임을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遙被人知半日羞(요피인지반일수) 멀리서 남에게 들켜 반나절 동안 부끄러웠네

●허초희

1589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본명은 초희(楚姬)이며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임. 1563(명종 18)년에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셋째 딸로 태어남. 봉(篈)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임.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 사이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으로 칭송되었음.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함.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고 함.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으며,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음. 친정집에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 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고뇌를 달램. 23세(1585, 선조17)에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 「몽유광상산」을 지음. 1589(선조21)년 27세의 나이로 별세함.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혔음.

1590(선조23)년 11월 남동생 허균이 친정에 흩어져 있던 난설헌의 시를 모으고, 자신이 암기하고 있던 것을 모아서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음. 1598(선조31)년 해 봄 정유재란 때 명나라에서 원정 나온 문인 오명제에게 허균이 난설헌의 시 200여 편을 보여줌. 이 시가 『조선시선』, 『열조시선』등에 실림. 동생 허균이 1606(선조 39)년 3월 27일 중국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모아서 전해주어 줌.

1607(선조 40)년 4월 허균이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출판하고, 발문은 태안 피향당에서 지음. 1711년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하여 『난설헌집』이 간행되고 애송됨. 1606(선조 39)년 『난설헌집』을 주지번에게 주고, 그녀가 죽고 나서 18년 뒤에 중국에서 출간되어 격찬을 받았음.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 수나 됨.

燕掠斜簷兩兩飛 (연략사첨양량비) 제비는 멋대로 처마를 차지 해 쌍쌍히 날며

(掠 노랼질할 략,斜 비낄 사,簷 처마 첨)

落花撩亂撲羅衣 (낙화요란박나의) 꽃가지를 흔들어 마구 꽃잎 떨구네 (撲 두드릴 박)

洞房極目傷春意 (동방극목상춘의) 동방에서 보이는 대로 봄을 애태우는 이 마음

草綠江南人歸. (초록가남인미귀) 강남은 풀 푸르겠건마는 그이는 소식이 없네

歇 古 澤 (헐 고 택) 옛집에서 쉬며

蕭蕭風雨岸烏紗 (소소풍우안오사) 부슬 부슬 비바람에 오사모 벗겨지고

 

三月韶光鬢半華 (삼월소광빈반화) 삼월이라 봄빛에 귀밑머리 반백이어라

 

客裏不堪佳節過 (객리불감가절과) 나그네 마음에 좋은 계절 보내지 못해

 

借人高館看梨花 (차인고관간리화) 높은 집을 빌려서 배꽃을 구경하는구나

●허 균 (許 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1569년 초당 허엽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89년(선조 22) 생원이 되고, 1594년 정시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지냈다.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다가 서울 기생을 끌어들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전적(典籍)·수안군수(遂安郡守)를 역임하였다.

1606년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여 명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1610년(광해군 2)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도가 되었고, 천주교 12단(端)을 얻어왔다. 같은 해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친척을 참방(參榜)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 후 태인(泰仁)으로 물러났다. 명나라에 여러차례 다녀오면서 수천권의 서적을 가져왔는데 이때 양명학을 접하게 되었고 특히 양명학 극좌파에 속하는 태주학파 이탁오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외의 학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허균은 주자학(성리학)의 허구성을 비판하였고 예학이 중심이 된 외곡된 학문을 개혁하고 민중을 위한 실용적 학문으로 조선사회의 변화를 추구했다. 문학적으로도 일정한 시문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불교에도 심취하였다.

선조 대에 붕당이 형성되었을 당시 대북에 속했으며 광해군이 즉위하자 당대 권신이었던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조정의 집권세력을 형성하였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하였으며 예조참의·호조참의·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지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으며 같은 해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였다.

3년 뒤 조카 사위인 의창군(義昌君)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역모 혐의를 받았다. 하인준(河仁俊)·김개(金闓) ·김우성(金宇成)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1618년 가산이 적몰(籍沒)되고 참형되었다. 당시 세자빈이 후사가 없자 허균의 딸이 세자 후궁으로 간택되었는데 후궁이 소생을 낳게 되면 허균이 실세로 등장할 우려가 있어 모함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허균은 시문(詩文)에 뛰어난 천재로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동생이며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 대표적 걸작이다. 작품으로 《교산시화(蛟山詩話)》,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성수시화(惺叟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도문대작(屠門大爵)》,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남궁선생전》 등이 있다.

省中夜直 (성중야직) 성중에서 야직하며

魚鐶橫戶燭撓光(어환횡호촉요광) 쇠고리 문짝에 비끼고 촛불 어지러운데

中禁詞臣坐玉堂(중금사신좌옥당) 궁중에 남은 시 짓는 신하 옥당에 앉아있다.

紫殿夜闌鈴索靜(자전야란령색정) 궁궐 늦은 밤에 바울 줄 고요한데

桐花時送隔簾香(동화시송격염향) 발 너머 오동나무에서 꽃향기 건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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